No. 1505 [칼럼니스트] 2009년 5월 7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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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는 좀 거시기하니 애칭 정도면... - 한문서당 이야기 07
박연호 (서울칼럼니스트모임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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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서당에 다니면서 겪은 당황스런 일 중 하나가 ‘호가 뭐냐’고 질문 받았을 때였다. 물론 서당 다니는 다수는 호가 없지만 그래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를 사용하며 상당히 중시하고 있다. 호나 자(字)는 전통사회에서는 필수적이었지만 지금은 서예가, 화가 등 일부 예술인들이나 사용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런 것과 아무 관계도 없는 처지에 그게 왜 없느냐고 물으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개량한복도 보통 사람은 아직 익숙하지 않는 세상에 왜 당신은 정식으로 도포에 갓을 쓰지 않았느냐고 추궁당하는 듯한 느낌이어서 그냥 웃어넘기곤 했다.

그런데 서당을 계속 다니면서 호라는 것이 아주 시대착오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차츰 하게 되었다. 그건 우리 사회의 호칭습관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도 이름을 중시하는 경명사상(敬名思想)이 뿌리 깊어 맨이름을 부르지 못한다. 예전에는 호나 자가 이름을 대신했지만 지금은 그게 없는 대신 대체로 직업이나 직책을 붙인다. 김국장, 이장관, 최의원, 정사장 등 현직이 아니면 예전 직책이라도 불러야지 아무개씨라고 그냥 부르면 ‘내가 당신 집 머슴인 줄 아느냐’ 또는 ‘동네 줄주정뱅이도 그렇게는 부르지 않는다’는 등의 항의를 받게 마련이다. 그럴 때 호 같은 것이 있으면 참 편리하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직책이나 직업이란 것은 그 사람에 대해서 좀 아는 바가 있을 때 말이지 서당에서처럼 처음 만났을 때는 호칭이 매우 난감하다. 미국인들 같으면 예를 들어 내 이름은 어네스트인데 ‘어니’라는 애칭으로 불러달라고 하지만 우리는 그런 게 없으니 어정쩡해진다. 만만한 것이 사장이고, 선생이어서 성 뒤에 우물우물 이런 것들을 붙여보지만 피차간에 개운치 않다.

그렇지만 서예도, 그림도 하지 않으면서 호를 갖는 것은 좀 쑥스러워 뭉개며 지내다가 옴짝딸싹할 수 없는 궁지에 몰렸다. 어느 선생님한테 20명 가까이 어떤 과목을 배울 때였다. 이를테면 그룹과외 같은 것이었다. 수강생 명단을 작성하는데 이름, 나이 외에 호도 기입하라고 하는데 나는 그게 없었다. 그걸 보시더니 선생님이 아직도 호가 없는 사람이 있는데 당신이 직접 지어주셔야겠다고 했다.

호를 원하지 않는다는 말도 할 수 없어 엉거주춤하고 있는데 한 여자 수강생이 조용히 속삭였다. “선생님이 호를 하사하시겠다는데 이건 보통 영광이 아니에요. 받는 날은 잔치를 해야 해요. 한복을 입고 선생님께 감사의 잔치를 올려야 하고 약간의 봉투도 준비해야 해요. 우리들도 다 참석할 거에요” 농담인가 하며 그녀를 정색하고 보니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한복, 돈도 보통 일이 아니지만 그 절차를 생각하니 순간적으로 이거 큰 일 났구나 싶었다. 그래서 얼른 “사실은 호가 있는 데요” 하며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불체(不滯)’라고 한다니 선생님은 약간 이해하기 힘든 호라는 표정이면서도 대충 넘어갔다. 수업이 끝난 뒤 동료 수강생들이 약간 특이하다며 그 뜻을 물었다. 뭐라고든지 둘러대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득점보다는 실점이 많고, 영광보다 오욕으로 더 점철된 적자인생을 살아 오고  있다. 이 세상에 올 자격이 애당초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본의 아니게 밀입국한 불법체류자로서 지내고 있다. 그래서 ‘불체’라고 한다니 선의로 해석한 이는 그보다는 ‘막히지 않고 살겠다’는 뜻이 아니냐고 보충해 주었다. 어떤 이는 열심히 살면 정식비자가 나올 날도 있을 거라며 위로해 준다. 하여튼 그날 해프닝 때문에 졸지에 호를 갖게 되었다.

그렇지만 지금도 나는 그걸 호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의 거룩하고 고명한 정식 호에 비하면 내 경우는 전혀 딴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를 부르기 편한 ‘애칭’ 또는 별명 정도로 이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또 이런 별칭들을 누구나 하나 정도 가지고 있으면 복잡한 호칭문제에 한 가닥 숨통이 트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2009.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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