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과 라이트

폭포 위에 집(‘落水莊’)을 짓기도 한 미국의 대표적 건축가 프랭크 로이 드 라이트(1867∼1959)가 설계한 구겐하임 미술관은 논란이 많은 건물이다. 달팽이 모양의 이 건물은 뉴욕의 수직 마천루 사이에서 눈길을 잡아 끄는 관 광명소로 현대건축사에 남는 탁월한 건축작품이지만 미술전시장으로는 낙제 라는 평가도 받는다.가운데 공간을 비워놓은 채 7층 높이까지 나선형 경사로 로 이어져 “기능적으로 볼 때 이 건물은 커다란 재앙”이며 “그림보다는 오히려 여기를 찾는 관람객들을 더 잘 전시하고 있다”는 말도 듣는다.그럼 에도 구겐하임 미술관은 풍부한 소장품(1년에 그 5%만 전시할 수 있을 정도) 과 현대미술의 최첨단 흐름을 보여주는 수준높은 기획전으로 유명한 세계 1 급 현대미술관이다.

이곳에서 지난 11일 개막한 ‘백남준의 세계’전(4월26일까지)이 큰 화제가 되고 있다. 5년의 준비기간과 200만달러가 넘는 예산을 쏟아부어 새천년 첫 전시회를 백남준 초대전으로 마련한 구겐하임측이 백씨가 “20세기 후반 예 술에 진정한 충격을 주었고 그의 예술세계가 현대 예술에 대한 우리의 개념 을 바꾸어 놓았다”고 평가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현지 언론과 미술계의 반응 도 호들갑스럽다.미술월간지 ‘아트 뉴스’는 1월호 표지기사로 다루면서 “ 백남준이 구겐하임 미술관을 점령했다”고 평했고 뉴욕타임스는 두쪽에 걸친 기사로 전시회를 상세히 소개하면서 백씨가 “모국인 한국에서는 물론 미국 에서도 ‘국보급 작가’ 반열에 올랐다”고 썼다.한마디로 ‘금세기에 가장 주목받을 전시회’라는 것이 뉴욕 미술계의 평가이다.

아직 전시회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두 천재 예술가 백남준과 라이트의 행 복한 만남이 눈에 선하다.나선형 경사로는 그 곡선의 벽면에 평면의 그림을 걸기엔 불편했지만 백씨의 비디오 예술 40년간 대표작을 한눈에 보여주는 전 시장으로는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무엇보다 구겐하임 미술관이 세워진 후 거의 활용하지 못했던 건물 중앙의 7층 높이 원통형 빈 공간을 더할 나위없 는 훌륭한 전시장으로 탈바꿈시킨 레이저 신작 ‘동시적 변조’를 지하에 묻 힌 설계자 라이트가 본다면 어떨까.“다양한 작품을 상호 유기적으로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 라이트에게 감사한다”고 백씨가 말했다지만 아마 라 이트도 자신의 건물을 더욱 빛내준 백씨에게 감사할 듯 싶다.그가 설계한 후 한번도 사용하지 않던 로비의 분수대가 이 전시회에서 처음 제 역할을 하기 도 했다니…전시장에 들어서면 TV 100대가 천장을 향해 놓여 있고 그 가운데 서 천장으로 쏘아 올려진 레이저 광선이 빗살모양을 그리며 천장에서 떨어지 는 폭포수('야곱의 사다리')와 어울리는 장관을 보게 된다는데, 설계자가 의도했던 대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 꼭대기까지 올라가 나선형 통로를 따 라 걸어 내려오면서 다시 작품을 감상하는 재미를 상상만 해도 달콤하다.아! 그곳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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任英淑 대한매일 논설위원 ysi@kdaily.com

대한매일 2000.0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