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종말

남미문학의 환상적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 ∼1986)는 모든 것을 상상의 산물로 보았다.그의 소설 ‘틀뢴,우크바르,오르 비스 떼르띠우스’에는 ‘틀뢴’이라는 상상세계와 ‘흐뢴’이라는 사물이 등장한다.즉 사물이 먼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하면 그에 따라 실제 로 존재하게 되는 사물이 ‘흐뢴’이다.

보르헤스의 이 상상세계는 문명세계의 속성에 대한 탁월한 통찰을 보여준다 .일찍이 사람들이 라디오를 상상했기에 라디오가 존재하게 됐고 자동차를 상 상했기 때문에 자동차가 존재하게 되었다.상상력이 전래동화의 요술방망이 역할을 하는 것이다.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옛날 사람들이 상상했던 것이 실현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공상과학소설은 그러므로 미래세계에 대 한 설계도인 셈이다.따라서 ‘틀뢴’이라는 상상세계는 그것의 백과사전을 만듦으로써 점차 현실화된다는 것이 ‘틀뢴,우크바르…’의 결말이다.최근 그 존재가 밝혀진 전세계적인 통신도청망 ‘에셜론’은 영국작가 조지 오웰 이 지난 1949년 발표한 미래소설 ‘1984년’속의 ‘흐뢴’이 현실화 된 셈이 다.오웰이 이 소설에서 만들어낸 또하나의 ‘흐뢴’인 ‘대형(Big Brother) ’은 한동안 전체주의 국가권력으로 이해됐지만 정보화기술 사회의 컴퓨터로 요즘은 대체되고 있다.

인터넷 신기술 시대의 개막을 주도한 미국의 대표적 소프트웨어 업체인 선 마이크로시스팀스의 공동창업자 빌 조이가 인터넷기술을 포함한 신기술이 30 년후 인류종말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음을 경고해 눈길을 끌고 있다.인터넷 잡지 ‘와이어드’에 기고한 글에서 그는 2030년이면 컴퓨터 성능이 현재보 다 100만배 이상 강해져 로봇이 인간지능을 뛰어넘어 스스로 복제능력까지 갖추게 될 것으로 보았다.또 원자 단위까지 쪼갤 수 있는 나노 기술이 초정 밀 스마트 무기를 싼 비용으로 양산하고 유전자 기술발전이 새생명을 무책임 하게 생성해 내면 원자폭탄보다 인간에게 더 무서운 위협이 되리라고 밝혔다 .실제로 지난 71년부터 90년대 말까지 컴퓨터 용량은 100만배로 늘어났고 반 도체 용량은 현재 18개월마다 2배씩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어 컴퓨터가 인간두뇌를 능가할 날은 멀지 않다.

로봇이 인간지능을 뛰어넘어 자기복제 능력을 갖고 인간을 종속화시키는 공 상과학 소설이나 영화는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출연한 할리우드 영화 ‘터미 네이터’를 비롯해 셀 수 없이 많다.빌 조이가 생각했듯이 “소프트웨어를 개선할수록 세계는 더 발전할 것”이라고 믿어 왔지만 기괴하고 음울한 공상 과학 소설·영화가 보여주는 가상세계 ‘틀뢴’이 현실화할 것을 생각하면 끔찍하다.인류 종말을 막기 위해 핵실험을 금지하고 있듯이 더이상의 신기술 발달을 막기위한 국제적 노력이 언젠가 시작돼야 할지도 모른다.그러나 그 작업은 핵실험 금지보다 훨씬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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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숙 대한매일 논설위원 대한매일 2000년 03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