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청의 고해

‘로마인 이야기’로 국내 독자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일본의 저술가 시오노 나나미는 가톨릭을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조직”이라고 말했다. 수많은 민족과 국가가 명멸한 지난 2,000년동안 지속해온 유일한 조직이라는 것이다. 지난 5일 그 내용이 일부 밝혀진 로마 교황청의 ‘회상과 화해-교회의 과거 범죄’라는 문건은 가톨릭의 어두운 과거와 함께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조직의 힘이 어디에 있는지를 동시에 보여준다.

이 문건은 가톨릭이 십자군 원정을 통해 7만여명의 이교도들을 학살했고 ‘성지회복’이라는 명분 뒤에는 불순한 동기들이 숨어 있었음을 인정하고 있다. 또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게 했다는 이유로 반유대주의를 표방하고 나치의 유대인 대량학살에도 침묵 했으며,신앙의 순수성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마녀화형식 등 혹독한 종교재판으로 중세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음을 고백한다. 콜럼버 스의 아메리카 발견 이후 선교 명분으로 원주민 학살에 정당성을 부여한 점도 아울러 사과하고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오는 12일 바티칸에서 거행할 참회의식 (미사)을 통해 40쪽 분량의 이 문건을 공식 발표하고 하느님께 용서를 구할 예정이다.2000년 대희년을 맞아 교회의 모든 구성원 들이 참된 회개를 바탕으로 새로운 3000년기를 열어가자는 의지를 문서화하고 교회의 이름으로 인류역사에 저지른 범죄에 대해 공개 적인 고해(告解)와 참회를 통해 용서를 청하는 것이다.루터의 종교 개혁으로 한때 위기에 처했던 가톨릭이 뼈를 깎는 자기쇄신으로 거듭날 때보다 더한 각오가 이 문건에는 담겨 있다. 가톨릭 교회 수장(首長)인 교황은 교리와 신앙 측면에서 잘못이 있을 수 없다는 무오류성(無誤謬性)의 교리와는 별개이긴 하나 이 문건의 작성과 발표는 교황의 잘못된 판단까지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잘못을 직시하고 고백하는 용기,그리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진리와 정의를 항상 지키고자 하는 태도,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진지한 자세와 유연성이 그 속에는 응축돼 있다.

한국 천주교회도 우리 근대사와 관련된 잘못에 대한 총체적 반성 표명을 해야 할 때가 아닐까. 일제하 천도교,불교,개신교는 3·1 운동을 주도하는 등 민족독립을 위해 큰 일을 했지만 천주교의 활동 은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安重根· 영세명 토마스)의사는 당시 조선천주교 책임자였던 프랑스인 뮈텔 주교에 의해 살인죄로 단죄, 배척당했고 병인양요때는 프랑스 신부 와 한국인 신자들이 프랑스군의 길안내를 맡아 결국 조선 민중에게 피해를 입히고 외규장각 약탈을 방조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유신시대 한국 천주교회가 반독재 투쟁에 앞장서 도덕성의 모범을 보여주었던 것과는 상반되는 모습이었다.

이 문제들에 대해 물론 교회 안에서 반성이 제기되기는 했다. 지난 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한국천주교 주교회의가 발행하는 월간지 ‘사목’은 ‘일제치하의 한국천주교회’라는 특집을 통해 식민지배를 묵인하고 신사참배를 허용하며 독립운동에 소극적이었던 천주교회의 과거를 깊이 반성했다.인천 가톨릭대는 97년 병인양요 당시 천주교의 역할을 반성하는 세미나를 갖고 전체 교수 명의의 사과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김수환(金壽煥) 추기경은 지난 93년 안중근 의사 추모 미사를 집전해 83년만에 안의사를 사실상 천주교 신앙인으로 복권시켰다.그러나 로마 교황청이 이번에 보여준 것과 같은 차원의 고해는 없었던 셈이다.개신교는 지난 가을 ‘하나님과 국민 앞에 우리 자신을 고발합니다’는 제목의 신문광고를 통해 최근 교회의 잘못과 신사참배 등을 반성한 바 있다.

무엇보다 가장 시급한 것은 사실 종교인들보다는 우리 정치인들의 반성이다.당리당략에만 치우쳐 후안무치한 그들이 새천년을 위해 로마 교황청의 ‘회상과 화해’정신을 조금이라도 본받는다면 우리 정치현실이 조금은 희망적으로 느껴질 수 있을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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任英淑 논설위원ysi@kdaily.com

대한매일 2000.0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