떳떳한 상놈의 세상을

한국계 3세 중국인으로 비교문화연구가인 찐원쉐씨가 최근에 펴낸 책 ‘한국인이여 상놈이 돼라’는 무더운 여름을 이겨내게 해준 자극제였다.고통스럽지만 책을 덮고 난 뒤의 후련함이 오래도록 남기 때문이다.한국인의 어리석음과 추악함,가망없는 점 등을 낱낱이 찌르고 파헤친 그의 지적은 어느 하나 틀린 것이 없다.

저자의 각오도 대단하다.할아버지의 나라 한국인들이 책을 읽은 다음 이를 갈며 “야!임마,너 다시는 한국에 오지마!”하는 욕설이 들려오는 듯하다고.그래서 ‘이미 각오는 되어 있다’고 밝혔다.그러나 그의 말대로 한국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슬픈 심정이 동시에 깔려 있다.

그는 한국,중국,일본을 넘나들며 살기 때문에 세 나라를 너무 잘 알지만 반대로 어느 나라에도 소속하지 못하는 특징을 지녔다.이를 살려 부패와 야만,천박함으로 가득찬 한국인의 추악한 모습을 매섭게 지적하고자 했다.그러나 생각보다 가혹하지 않다.아니 차마 하지 못했으리라.

우리가 고쳐야 할 점을 워낙 광범위하게 다루었기 때문에 한 가닥으로 간추리기 힘들지만 김치와 마늘문제 등을 빼면 유교와 양반의 폐해로 압축된다.장점도 없지 않지만 그것까지 다루면 초점이 흐려지고,전개하는 논지의 방향이 모호해져 다음 기회로 미루었을 것이다.

사실 우리가 유교와 양반문화의 장점을 논하기에는 현실적 폐단이 구제 불가능 단계에 이르렀다.그만큼 절박하다.그것은 허세,체면,편협으로 잘 드러난다.그가 책 곳곳에 지적한 것을 일일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뒤틀린 체면의식은 나라를 이미 망조로 몰아넣었다.

웬 나라가 양반,귀족,인텔리로 표현되는 박사,고위 관료,유명 학자,판사,검사,의사는 넘쳐난다.반면 사농공상(士農工商)시절이 언제인데 농공상은 아직도 사로 대표되는 정치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저자는 농민,상인,공장근로자 등 과거의 ‘상놈’들이 ‘상님’ 소리를 듣는 사회가 되지 않으면 이 나라는 어렵다고 진단한다.그래서 많은 한국인들이 떳떳한 상놈이 되고 당당한 대우를 받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맞는 말이다.그러나 그 뿌리가 너무 깊어 절망적이다.누구든지 자신과 주위를 돌아보라.우리의 체면병이 얼마나 중태인지 알 것이다.가장 가까운 예가 자동차다.IMF체제에 들어 실직자가 되고서도 차를 버리지 못하는 한국인 친구를 보고 그는 놀랐다고 했는데 그런 사례가 적지 않다.

물론 실직자,파산자가 늘면서 차를 포기한 사람들이 많았다.중고차 시장과 폐차업자들이 그만큼 호황을 누렸다.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많은 사람들이 체면 때문에 차를 끌고 다녔다.

어느 자동차 관계 전문가가 이를 매우 실감나게 설명했다.한 가정이 망하는 과정을 차를 보면 안다는 것이다.즉 차가 있으면 그 집이 아직은 버티고 있다.차는 최후의 신분증으로 만약 그걸 처분하겠다고 나서면 이제 완전히 끝났다는 신호라는 것이다.

선진국 사람들은 소득이 줄면 그날부터 생활이 달라진다.거기에 맞춰 살기 때문이다.그러나 우리는 다르다.옷이 날개라는 말이 왜곡돼 오히려 비싼 옷을 입어야 하며,애들까지 기죽으므로 집도 줄여서는 안된다.그리고 3D직종은 물론 가능하면 일반적인 육체노동도 할 수 없다.

마지못해 나서더라도 누가 볼까봐 일을 충실히 하지 못한다.‘비록 지금은 이 일을 한다만 나는 본래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같지 않은 자존심으로 위안을 삼으면서 말이다.

그러다 보니 정말 이 사회를 든든하게 받쳐주고 이끌어 온 사람들까지 숨어서 기죽게 하는 못된 풍토를 만들고 있다.돌아 보라.얼마나 많은 이들이 먹을 것 제대로 못 먹고 헐벗으며, 험한 일로 일가를 이루고도 음지에서 한숨 쉬고 있는가를.학벌,정신노동 등으로 포장된 양반의식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그동안 보통 사람,신한국인 지금은 신지식인이라는 이름으로 대우하며 역대 정권이 사기 진작,의욕 고취를 도모하고 있지만 본질적 변화는 어림없는 실정이다.

저자 말대로 한국을 더 이상 양반의 사회로 남겨두어서는 안된다.상놈이 ‘상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이것은 우리의 마지막 탈출구다.그가 지적하지 않았지만 한 가닥 희망은 있다.젊은 세대의 사고방식이 급속히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그들은 하루가 다르게 저자가 바라는 상놈의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따라서 괴롭더라도 계속 애정을 가지고 한국을 지켜 봐주기 바란다.

박연호 국민일보 논설위원
1999.9.15
서울칼럼니스트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