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동열 투수상

외국 스포츠전문지를 정기구독할 정도로 열성이어서 스포츠가 본업 같은 한 정신과 의사는 선동열이 국내 프로야구계에 있는 한 해태의 ‘불공정 게임’은 사라지지 않고 한국 야구는 자칫 침몰한다고 늘 주장했다.선동열이 등판하면 상대팀 9명은 해태의 11∼12명과 싸우는 꼴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우수한 선수가 있으므로 프로야구 전체가 발전하는 거 아니냐고 반문하니 그건 본궤도에 올랐을 때 일이지 초창기에는 해태의 독주가 다른 팀의 의욕을 저하시켜 같이 망할 수 있다는 분석이었다.아마추어 평론가의 믿거나 말거나식 해설이 그럴 듯해 나중에 프로야구 전문기자한테 물으니 거의 정확한 지적이라고 평했다.

그 ‘불공정 게임’의 대표적 예가 88년 빙그레-해태의 한국시리즈였다.1차전에서 7회 1사까지 잘 던지던 선동열이 갑자기 마운드에서 내려왔다.손가락에 물집이 생겼기 때문이라며 다음 시합에는 지장이 없다고 큰소리쳤다.

3차전 선발은 문희수였으나 선동열이 여차하면 구원에 나서겠다는 태세로 불펜에서 몸을 풀자 상대팀은 그가 오르기 전 대세를 장악하겠다고 공격을 서두르다 자멸하고 말았다.물론 그는 마운드에 오르지 않았다.

이후 6차전까지 그는 불펜에서 몸만 풀었지 한번도 투수판을 밟지 않은 채 해태가 우승했다.실제로 부상이 만만치 않아 등판할 수 없었다.빙그레는 그걸 모르고 그가 언제 던질 것인가에 신경을 곤두세우다 경기흐름을 놓쳤다.당시 신문기사는 이를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격퇴한 고사에 비유했다.

그는 일본 프로야구에서도 유감없이 진가를 발휘했다.그가 96,97년 두 해 벌어들인 돈만 해도 웬만한 대기업체의 대일본수출 순수익과 맞먹을 정도였다.또 정부나 기업의 그 누구보다도 효과적으로 한국이미지를 개선한 역대 최고 주일 외교관이라는 평을 들었다.

그러나 경기는 상대가 있는 것이기에 항시 오름세만 탄 것은 아니었다.89년 시즌에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유승안,이종두 등에게 만루홈런 등을 맞고 허덕였는가 하면 일본 진출 첫해 죽을 쒀 본인은 물론 팬들을 실망시키기도 했다.하지만 그는 곧 재기했다.그렇기 때문에 팬들은 열광했고 또 정상에서 미련없이 물러났기에 그의 은퇴는 더욱 아름답게 빛난 것이다.

이에 맞춰 한국야구위원회(KBO)가 ‘선동열 투수상’을 제정하기로 했다.미국의 ‘사이영’상,일본의 ‘사와무라’상에 맞먹는 권위있는 상으로 만들어 가겠다는 것이다.그가 한국과 일본에서 이룩한 신화,불같은 투혼에 비추어 볼 때 적절한 방안이라고 본다.한국 프로야구도 이를 밑거름 삼아 힘찬 기세로 뻗어나갈 것이다.

/ 박연호 논설위원 ynhp@kukminilbo.co.kr
국민일보 1999.1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