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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천년으로 떼밀리지 않도록 희망,역사적 대전환,새로운 시작 등 온갖 수사를 앞세운 2000년가 카운트 다운에 들어갔다.이를 맞이하는 설렘,감동이 어찌 없겠는가.누가 감격하고 기뻐하지 말래도 저절로 흥이 날 때이다. 그러나 묵은 천년 마지막 해나 새 천년 첫 해돋이를 찾아 떠나는 일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가라앉은 분위기다.오히려 뉴 밀레니엄이니 즈믄 해니 하는 말만 들으면 짜증나서 못 견디겠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어느 관계자가 푸념했듯이 우리 국민은 새 천년의 축제 의미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일까. 새천년위원회가 준비한 새 천년 맞이 행사는 계획표만 봐도 춤과 노래,놀이로 가득차 어깨춤이 절로 날 지경이다.시민 12만명이 오는 31일 밤 서울 광화문 일대에 모여 빅쇼를 즐기도록 구성되어 있고 일몰 일출 행사가 전국 각지에 널려 있다.또 날마다 신문·방송 등은 호들갑스럽게 뉴 밀레니엄,새 천년을 외치고 있다.이래도 즐겁지 않을 테냐고 종주먹을 대는 것 같다.아니 기쁨을 강요하는 것 같기도 하다. 자고로 우리는 명절 대목부터 슬슬 흥이 솟으며 누구를 만나든 넉넉한 마음이 앞섰다.웃음과 온기가 끊이지 않으며 사랑방,마을의 공터 등은 신명으로 가득 찼다.따라서 명절 의미를 모르거나 놀 줄 모르는 것이 아니다.핑계만 있으면 한판 벌이고 싶어하는 것이 특성이라 해도 무리가 아니다.그럼에도 왜 이렇게 축 처진 사람들이 많은가. 우선 청산해야 할 것들을 하지 못한 점을 들 수 있다.지금도 그렇지만 전통사회의 설 대목은 과거청산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대표적인 것이 묵은 빚이다.남에게 부채가 있으면 섣달 그믐 밤까지는 반드시 갚고 안 되면 다른 방법으로라도 매듭을 지었다.그래야 새해 첫날 웃는 낯으로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경제적 삶의 질을 가늠하는 고통지수가 IMF체제 이후 10배가 넘게 뛰었으며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날로 심화되고 있다.한마디로 명절이나 새 천년 오는 것이 더 고통스런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뜻이다. 하지만 국민에게 가장 큰 빚을 진 정치는 전혀 청산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아니 도리어 거꾸로 가 국민의 부담을 더욱 무겁게 하고 있다.희망이 가득할 것 같은 새 천년 첫 해에 치를 총선거에 가장 애타는 사람은 누구일까.여,야당과 출마자들이라고 하겠지만, 천만의 말씀 국민들이다.지지 정당은 없는데 그 중의 누군가를 골라야 하는 것은 이만저만한 고통이 아니다.생각하면 지금부터 울화통 터진다는 사람들이 많다.그런 상태에서 새해를 맞으면 뭐할 것인가. 경제, 교육, 행정 등의 정상화 및 능률성 제고도 까마득하고 부정 부패의 근절은 싹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이 땅에는 절망밖에 없다는 극단적 분노를 감추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는 것이 아니라, 산천은 오염, 파괴되고 구습은 예보다 더하며 가야 할 구악인물들은 갈수록 기세 등등하기 때문이다. 이런 판국에 정부가 주도하는 새 천년 맞이 잔치는 실속보다 의미, 상징, 선언의 과잉상태를 이루어 국민들의 실생활과 겉돌 공산이 크다.물론 주최측은 ‘진정 소외된 이 없는 전 국민의 축제로 새 천년 행사를 승화’시키겠다고 하나 이것이 현실적으로 어떻게 구현될지 궁금하다.기발한 아이디어는 곳곳에 넘치지만 국민들의 피부에 진하게 와 닿는 것은 별로 많지 않다. 한 예로 매향(埋香)을 들 수 있다.고려시대에 향나무를 땅에 묻으면 언젠가 미륵불이 나타나 고난에 빠진 민중을 구해준다는 신앙이 있었다.이를 묻으면서 함께 세웠던 매향비에는 향나무를 묻는 인원수,규모 등을 기록했다.그걸 서양의 타임캡슐과 연관지어 정동진에서 그 발굴행사를 벌이는 것은 견강부회라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누구보다도 가무와 음주를 즐기는 우리 민족이다.그런 사람들이 이렇게 멍석을 깔아도 시큰둥한 건 흥이 일지 않아서다.즉 희망,기쁨의 근거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예전에 하루를 일년같이 애태우며 기다리던 제대 날 막상 주춤거리며 마지못해 사회로 나가던 가난한 집 출신의 제대 장병들이 적지 않았다.지겨운 군대생활에서 벗어난다는 기쁨은 잠시고 나간 후를 생각하면 막연한 생계가 두고두고 괴롭기 때문이었다.그래서 그들은 희망보다 불안을 안고 사회로 떼밀려 나갔다.지금 2000년을 앞둔 우리 국민 가운데 그처럼 새 천년을 맞는 게 아니라 마지못해 그 속으로 떼밀려 가는 사람들이 많다.이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온 국민이 같이 하는 축제가 될 것이다. / 박연호 국민일보 논설위원 국민일보 1999년 12월 22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