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부터 흥청망청

연산군은 조선 팔도에 채홍사(採紅使),채청사(採靑使)를 파견,아름다운 처녀와 건강한 말을 뽑고 각 고을에서 미녀와 기생들을 관리하게 했다.명칭도 기생에서 운평(運平)으로 바꿨다.

또 원각사를 폐지하여 기생양성소로 개편하고,오늘날 국립대학에 해당하는 성균관도 학생들을 내쫓고 유흥장으로 만들어 버렸다.전국을 이처럼 접대부 양성소 및 대기소로 만들어 놓고 눈에 드는 운평은 대궐로 불러 들였다.

궁중에 들어가면 명칭이 흥청(興靑)으로 바뀌며 지체가 높아졌다.그러나 흥청이라고 다 같은 흥청이 아니었다.임금의 마음에 들어 잠자리를 같이 하면 천과(天科)흥청이라 하여 급수를 높였다.그렇지 못한 흥청은 반대로 지과(地科)흥청에 머물렀다.

벼슬아치나 선비들로 하여금 흥청들을 태운 가마를 메게 했으니 천지가 뒤바뀐다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을 저질렀다.그런 식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흥청들과 놀아났다.자신이 말이 되어 흥청들을 태우고 기어다니지 않나,반대로 자기가 그녀들 등에 올라 타 말놀이를 즐겼다.그도 모자라 민간 유부녀도 이쁘다는 말만 들으면 불러다 함부로 겁탈하고,심지어 큰 아버지인 월산대군의 부인까지 성추행했다.

그 결과 중종반정이 일어나 왕좌에서 쫓겨나고 목숨을 잃었다.그렇게 흥청들과 놀아나다 망했다 해서 백성들간에 흥청망청이란 말이 생겨났다.따라서 이 말에는 그 유래가 시사하듯이 망조가 들어도 단단히 들었다는 비아냥과 경고가 함께 들어 있다.

보도에 따르면 연말을 앞둔 서울 시내가 벌써부터 흥청거리기 시작한다는 것이다.20세기 마지막 송년회니 새 밀레니엄 환영회니 하면서 유명호텔,고급 룸살롱 등의 예약이 넘쳐나고 있다.IMF체제라고 차분하고 조촐하게 보냈던 지난해 연말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누구나 알다시피 우리가 IMF체제를 졸업한 것도 아니고 경기가 정상적으로 회복된 것도 아니다.갈수록 사회의 그늘진 곳은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그럼에도 건망증 환자들처럼 이렇게 나대니 한심하기 이를 데 없다.

수도사들처럼 금욕적으로만 살자는 것은 아니다.이보다 더 어려웠던 시절에도 꽃 피면 봄이라고 한 잔,낙엽이 지면 가을이라고 또 한 잔 하며 풍류를 즐겼다.그러나 그건 무조건 고급,호화로움을 추구하던 흥청망청과는 달랐다.

사치 풍조,흥청망청은 일종의 정신병이다.그 다음은 연산군처럼 철저히 망하는 길로 가게 된다.한두해 전의 일을 망각하고 그 어리석음을 되풀이하면 우리는 결코 재기하지 못한다.20세기가 가든 새 천년이 오든 변함없이 필요한 건 절제와 인간 본연의 자세다.차분하게 연말연시를 보내도록 하자.

/ 박연호 국민일보 논설위원 ynhp@kukminilbo.co.kr
국민일보 1999.1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