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맛이라도 있으니

중국 대학에서 한국어 강의를 하다가 지난 봄 잠시 귀국한 원로 교수가 어느 식사자리에서 중국을 휩쓸다시피한 ‘사랑이 뭐길래’ 등 한국의 TV드라마가 부교재 역할을 톡톡히 한다고 전했다.그러나 한국 드라마들이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는 명분 아래 대사가 너무 거칠고 저속한 부분이 있어 한국말을 배우는 중국인들마저 외면하는 부분이 많다며 걱정했다.또 사전에도 없는 유행어가 왜 그렇게 많이 나오는지 국어선생 못해먹겠다며 웃었다.짱,찜,캡 같은 말들이 나오면 서울의 자식들한테 전화로 물어 가르쳐야 한다니 그 고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어 학생들은 공부를 위해서 그렇다손 치고 일반인들이 좋아하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고 했다.하지만 피상적으로 보면 여성상위시대의 중국 남성들이 남자가 큰 소리치는 ‘대발이 집’에서 대리만족을 얻는 것도 한가지 원인 같다고 분석했다.그 외에 각자 나름대로 한 마디씩 했지만 근거 부족한 추정일 뿐이었다.

이에 관한 의문이 다시 떠오른 것은 최근의 또 다른 모임에서였다.한 친구가 베트남에 갔더니 새해 달력의 모델이 모두 한국 연예인이고 방송에서는 한국 드라마가 판을 치더라는 것이다.일반인들을 만나면 최진실 안재욱 장동건 등을 자기 나라 연예인들보다 더 잘 알더라고 전했다.오는 12월16일부터 3일간 ‘장동건 쇼’가 대형 공연장에서 열리는데 베트남 톱스타들이 총출연하며 그곳 팬들의 열기가 벌써부터 대단하다는 소식이다.

이는 중국의 현상과 비슷한 것으로 단순한 연예계 화제 아닌 문화산업 측면에서 파악해야 이해가 가능해진다.미국 일본에 비해 심하면 1백분의 1에서 몇십분의 1밖에 안되는 제작비를 들인 한국 프로그램이 중국에서는 같은 값에 팔린다.베트남에서도 홍콩 미국 일본 대만의 작품들을 물리치고 외화부문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영상물 무역적자국인 한국이 왜 중국 베트남에서 선전하는가.한마디로 그곳 시청자들의 정서,분위기를 열심히 파악하고 가능한 한 그들의 욕구에 맞추려 주력한 덕이다.영상미의 일본,막강한 물량의 미국과 대등할 수 있는 것은 한국 작품이 낯설고 신선하면서도 중국,베트남인들의 정서에 많이 부합하기 때문이다.또 미국 일본 등에 대해서 적지않은 반감이 깔려 있는데 그 틈새를 한국이 놓치지 않고 파고든 것이다.

결과적으로 외교관 몇백명이 10년간 활동한 것보다 드라마 한 편의 힘이 훨씬 강력함을 입증했다는 평까지 들었다.실제로 설악산 등 국내 관광지에 대만인들 못지않게 중국인들이 늘어나는 것도 그 파급효과다.베트남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여기에 만족하면 곧 허물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당분간은 우리가 우세하지만 전통적 강국인 미국 일본 홍콩의 반격에 대비해 치밀하고 과학적인 연구,재정적 뒷받침이 따라야 합니다.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단순한 상업적 차원이 아니라 다른 나라 시청자들의 정서와 자존심을 존중하는 프로그램으로 승부를 가려야 한다고 봅니다.그것이 진정한 문화수출의 길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한 관계자는 이같이 다짐하며 분야는 다르지만 역시 중국에서 세계강국들과 어깨를 겨루며 우세한 게임을 하는 국내 화장품을 예로 들었다.최근 다국적 화장품회사가 한국여성만을 목표 삼아 신제품을 개발,국내 공략에 나섰다.세계 10위 규모를 자랑하는 화장품 시장에 이처럼 무차별적인 외국의 공략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이렇게 되면 국내 화장품회사는 세계시장 진출은커녕 제 집안도 남에게 내줄 판이다.

그러나 국내업계는 틈새시장을 노리며 세분화,차별화에 주력했다.동양인 특히 사계절이 뚜렷한 지역의 여성들은 피부특성상 기초화장품에 관심이 쏠리고, 서양여성들은 선탠을 즐기며 자외선에 강한 피부를 갖고 있다는 점을 집중 연구했다.이어 우리와 비슷한 기후,환경의 중국시장을 목표로 철저한 실험과 다각적인 적응노력을 한 끝에 태평양과 LG가 서양과 일본을 제쳤다.국내시장 방어는 물론이고.중국 시장의 규모를 보면 틈새가 아니라 본격적인 마당이나 다름없다.

일부 분야에 불과하지만 우리에게도 이렇게 치밀하고 무서운 저력과 경쟁력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흐뭇한 일인가.드라마나 화장품과 아무 상관없는 이들까지도 살맛나는 얘기라며 반가워했다.신선하기까지 하다는 사람도 있다.

미래고 뭐고 없다는 듯이 이전투구로 날을 새우는 통에 국정마저 혼란스러운 요즘 정세와 비교하며 절망밖에 없는 것 같은 우리에게도 이런 능력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고도 했다.그러면서 누군가가 농담을 했다.드라마나 화장품업계에서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밝히지 말라고.알려지면 또 정치판에서 데려다가 사람 버려놓고 그만큼 국가경쟁력 저하시킨다며.

/ 박연호 국민일보 논설위원
국민일보 1999.1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