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고 닳도록 지금처럼?

자기가 죽거든 곡을 하지 말라고 자식들에게 엄명한 백호 임제(林悌 1549∼1587)가 세상을 뜬 것은 임진왜란이 터지기 5년전이었다.유교이념이 지배이데올로기이던 시절 부모의 상을 당해서 곡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사회의 절대 가치를 부인하는 범죄나 마찬가지였다.그럼에도 그는 왜 자식들에게 이를 당부했는가.

조선초기 김시습에 버금가는 자유인이었던 그가 당대 현실을 통해 본 것은 부조리와 당쟁뿐이었다.서로 헐뜯고 비방하며 패거리를 지어 질시하는 지도층 인사들의 속물근성과 몰골에 진저리쳤다.“천하에 제왕을 일컫지 않은 나라가 없는데 오직 우리나라만 그렇지 못하니 이같이 못난 나라에서 태어났다가 죽는데 무엇이 아깝겠느냐.너희들은 조금도 슬퍼할 것이 없다.내가 죽어도 곡을 하지마라” 웅대한 기상도 진취성도 없이 좁은 땅에서 아옹다옹하며 자기들끼리 찢고 발기는 한심한 사람들이 못난 조국에 대한 그의 절망을 알아들을 리 없었다.

마흔도 안 돼 세상을 뜬 그가 더 살아 임진왜란을 겪었다면 아마 너무 기가 막혀 유언을 남길 엄두도 못냈을 것이다.이 나라는 그의 사후에도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망조로 치달았기 때문이다.임진왜란,병자호란의 치욕,일제침략을 겪고도 한국병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더욱 깊어져 오늘날에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남아 있지 않은가.지금 만약 임백호가 깨어난다면 이런 못난 나라에 후손을 둔 것조차 후회할지 모른다.

미래는 어떨까.“21세기의 우리 모습과 새 천년의 전망이요? 간단해요.우리의 특징이 어디 가나요.지난 5천년간 지지고 볶고 서로 헐뜯으며 지지리 못나게 살아온 저력을 살려 앞으로도 최소한 5천년은 그렇게 살아나갈 거요.이 민족이 지구상에서 5천년 동안은 그래서 절대 없어지지 않아요.애국가처럼 마르고 닳도록 ” 어느 정신의학자의 자조와 냉소 어린 독설이 이에 대한 대답이 될 것이다.

최근에 나온 김용운 교수의 책 ‘카오스의 날갯짓’은 우리 민족에 대한 이 지독한 절망을 뒷받침해주고 있다.복잡성과학과 원형사관을 통해 한국의 역사와 사회를 분석한 이 책이 프랙털(fractal)이론에 비추어 본 우리의 모습은 한심할 뿐이다.

프랙털을 지극히 단순화해서 설명하면 복잡한 자연현상과 사회상,인간성 속을 더 깊이 들여다 보면 닮은꼴이 잠재해 있다는 것이다.일례로 파도의 일부분을 확대하면 전체 파도와 같고, 반대로 축소하면 전체의 한 부분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를 확대 적용하면 우리가 비난하는 다른 사람들의 비리 요소가 내 속에도 있고, 그것들이 모여서 못난 나라를 만들어가는 것이다.이런 요소는 시간적으로도 나타나 부패,비리의 역사가 되풀이된다.결과적으로 사회의 모든 부정적 현상에 우리 모두가 알게 모르게 참여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비리를 저지르고도 이를 악용해 남의 탓으로 돌리려는 이들에게 핑계를 제공할 우려가 많지만 엄연한 현상은 부인할 수 없다.

정말 우리는 새 천년,21세기에도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가.김교수는 이탈리아 경제학자 파레토의 법칙을 원용하면 사회적 병리를 치유할 길이 있다는 희망을 제시하고 있다.그것은 파레토가 사회현상 속에서 발견한 20 대 80의 원리로 고객의 20%가 매상의 80%를 차지하며, 교통사고의 80%도 20%의 운전자가 저지른다는 것이다. 이 원리는 여러 분야에서 확인된다.신자유주의와 시장원리를 앞세운 세계화가 20%의 유복한 층과 80%의 빈곤층으로 가른다는 불길한 예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사람이나 조직이 개선을 위해 노력할 때도 성과의 80%는 투입한 20%가 가져다 준다.즉 20%가 애쓰면 전체를 새로운 모습으로 바꿀 수 있다는 말이다.김교수는 이 20 대 80의 법칙이 우리를 구해줄 희망임을 시사하고 있다.이 법칙은 20%의 엘리트가 80%의 대중을 이끌어가야 한다는 파시즘의 근거가 되기도 했지만 학술법칙은 가치중립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를 나무랄 일은 아니다.

우리는 이제 이 20%를 창출해야 한다.바꿔 말해 5분의 1법칙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이 사회 곳곳에서 긍정적으로 작동해 사회병리를 치유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정치,교육,종교 등이 이에 적극 주목하여 이끌 것이며 개개인도 자발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해야 한다.현재로서는 가장 가능성 높은 대안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 해서 임백호의 한이 4백년 만에 풀리고 그 정신의학자를 묶은 절망의 굴레가 끊기도록 해야 할 것이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간절한 염원이다./논설위원

박연호 국민일보 논설위원
1999년 10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