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殺氣


미국인들이 애송하는 시 가운데 ‘The Cold Within’이라는 작품이 있다．우리 말로 바꾸면 ‘내부의 추위’정도가 되겠지만 ‘우리 속의 살기(殺氣)’로 의역해도 무리는 아닐 듯 싶다．작자 미상의 이 시 내용은 대강 이렇다．

여섯 사람이 우연한 기회에 춥고 어두운 곳에 갇혔다．그들은 모두 나무 지팡이를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시간이 지나자 그들 앞의 모닥불이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이 때 지팡이를 의식한 한 여자가 자기 것을 꽉 움켜쥐었다．그 가운데 흑인 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다．자기 지팡이를 태워 흑인을 따뜻하게 해준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두번째 사람은 남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말은 교회 나가 있을 때나 실천하지 거길 벗어나면 그만이었다．그래서 자기의 자작나무 지팡이를 태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세번째는 남루한 옷을 걸친 사람이었다．그는 누더기옷을 더욱 추스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흥,저 게으름뱅이 부자들을 위해 왜 내가 희생해야 해．어림없지．

네번째는 부자였다．그는 자기가 모은 재산에 대해서만 골똘히 생각했다．어떻게 하면 축내지 않고 잘 지키느냐 하는 것이었다．

다섯번째 사람인 흑인은 불기가 사라져가는 것과는 반대로 복수의 감정이 더욱 뜨겁게 타올랐다．이 기회에 어떻게든지 백인들에게 앙갚음을 하리라 별렀다．

여섯번째 사람은 다른 사람들 것은 놔두고 자기 것만 태우는 일은 불공정하다고 생각했다．결국 그들은 모두 얼어 죽었다．각자 지팡이를 단단히 움켜쥔 채．

그리고 시는 이렇게 끝난다．‘그들은 바깥의 추위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마음속의 차가움에 얼어 죽었다’(They didn’t die from the cold without．They died from the cold within.)

맹목적인 증오,차별,근거없는 편견,언행 불일치의 신앙심,빈부의 갈등,이기심 등이 남만 죽인 게 아니라 자기 목숨까지 빼앗은 것으로 우리 사회를 그대로 묘사한 것 같다．자기는 이런 여섯 사람 가운데 어느 누구도 닮지 않았다고 당당하게 말할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인가．

대표적인 것이 정치판이다．나라살림을 함께 꾸려간다는 교과서적 역할을 기대할 어리석은 국민은 이제 없지만 이러다가 나라 망하겠다는 우려를 하는 사람은 많다．그들의 정쟁에는 살기와 증오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긴 조선왕조 정치인들도 그렇게 싸우다 마침내 나라까지 잃고 말았다．어린애들까지 어른들의 당파싸움에 감염됐으니 그 패거리 싸움의 야비함과 치열한 정도를 짐작하고도 남는다．당시 고관들의 행차는 서당에서 공부하는 학동이나 골목에서 놀던 어린이들의 큰 구경거리였다．그러나 무조건 구경하지 않았다．동인 집안 아이는 서인이나 남인 등 다른 당파의 행차는 눈을 흘기며 외면했고 서인,남인,노론,소론 등의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천진난만해야 할 아이들까지 그렇게 오염시킨 정치판의 죽기살기식 싸움의 원형은 식민지,분단,동족상잔의 전쟁을 겪고도 그대로 남아 있다．지금은 지역감정까지 더해져 도대체 같은 나라 사람일까 싶을 정도로 지악스런 싸움에 편할 날이 없다．

정치인들만 그런 게 아니다．외국인들도 지적하는 한국인의 추악한 파벌의식은 조금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배웠다는 사람들은 더하다．고향이 같다는 단순한 이유 하나만으로 대우가 갑자기 달라지고,처음 만난 사람도 같은 학교 출신이라면 백년지기처럼 돌변하는 태도를 보면 소름이 끼친다．그 뒷면에는 다른 지역,다른 학교 출신에 대한 지독한 배타심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그건 애향심,모교애를 벗어난 사실상의 폭력이다．

그뿐인가．빈부격차는 갈수록 벌어져 사회위험도는 갈수록 높아지고,종교는 나날이 번성하는 반면 폐쇄적이고 편협한 사람들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꺼져 가는 불길에 내 지팡이를 던질 사람은 찾아보기 힘든 세상이다．

저쪽하고 같이 죽는 것은 몰라도 더불어 사는 방법은 아예 사전에 없다는 식이다．그러면서 너나없이 만나면 절망을 얘기한다．각자 마음속에 들어 있는 살기와 독소를 조금만이라도 완화시키면 달라질텐데 그건 못한다．그로 인해 상대방이 편해지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같이 죽자는 여섯 사람과 다를 바 없다．

언제까지 이래야 할 것인가．죽은 다음의 지팡이처럼 쓸모없게 될 재산,증오,이기심,편견,편협한 신앙이 결국은 남과 함께 나도 살해하는 것임을 깨닫는 사람이 늘어나지 않는 한 절망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박연호 국민일보 논설위원
1999.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