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층의 결혼.장례식

어느 대학의 지명도 높은 교수가 둘째 딸 결혼식 뒤 엉뚱한 문제로 곤욕을 치렀다.첫째 결혼식에 느낀 바 있어 양가의 가까운 친척과 친지를 50명 이내로 초청,종교시설에서 간결하게 진행했던 것이다.

칭찬을 들어도 백번 들을 처사였다.그러나 반응은 그게 아니었다.먼저 초대받지 못한 친척들이 강력하게 항의했다.‘요새 세상에 꼭 몇 촌 이내로 제한할 수 있느냐.우리는 그렇게 못난 친척이냐’며 심한 경우 감정적 언사도 마다하지 않았다.두번째는 친구들이었다.누구는 초대받았는데 나는 그 정도도 안 되느냐며 역시 감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세번째는 참석한 사람들의 항의였다.축의금을 받지 않는다고 입구에 써붙여 놓았는데도 굳이 내겠다고 우기며 방명록을 관리하는 어린 학생을 몰래 다그치니 도리없이 받은 건이 몇 되었다.나중에 이것이 알려지면서 누구 것은 받고 어떤 것은 안 받았느냐는 비난이 들어왔다.

건전한 혼례문화 정착에 이바지해보겠다는 소박한 노력은 골치만 아픈 결과를 낳았다.주최측이 좀더 치밀하게 대응하지 못한 점도 있지만 우리 사회의 겉치레가 어느 정도 심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준 예였다.만약 그 혼주가 그렇고 그런 사람이었다면 그같이 격렬한 반응이 나왔겠는가.혼주와 가까운 사이라는 점을 강조해 둘 만큼 아직도 쓸모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은 어린 아이도 안다.그러니 어찌 씁쓸하지 않겠는가.

생활개혁실천범국민회의가 올해 혼례 및 장례문화의 모범이 된 지도층 인사와 부정적 영향을 끼친 인사를 선정했다.악영향을 미친 인사로 권노갑 국민회의 고문,박철언 의원,김진호 전합참의장,이연택 국민체육진흥공단 이사장 등 4명을 뽑았다.이들은 자녀 결혼식을 호화예식장에서 치르며 대규모 하객을 초청,교통혼잡까지 빚었다.권고문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축의금도 받았다.솔선수범을 해야 할 인사들이 그렇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앞의 교수처럼 치렀다면 어떻게 됐을까.이른바 끗발 좋은 이들과 가까운 사이임을 강조하고 싶은 사람들의 아첨 섞인 사이비 비난이 넘쳐났을 것이다.그런 점에서 이들의 호화혼례식을 비난만 할 게 아니라 이해도 해야 할 것 같다.

같은 맥락에서 고건 서울 시장,손길승 SK그룹 회장,신영국 의원 등 모범사례로 뽑힌 7명은 더더욱 돋보일 수밖에 없다.그들은 그런 과잉축하 또는 애도를 피하기 위해 조용히 일을 치렀다.

애경사를 통해 속 보이는 충성심을 전달하려던 사람들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보통 시민들 처지에서 보면 그들이야말로 명실상부한 지도층 인사인 것이다.앞으로 그런 인사들이 더욱 늘어나야 한다.그래야만 이 사회에도 조금씩은 살맛이 생길 것이다.

/박연호 국민일보 논설위원 ynhp@kukminilbo.co.kr
국민일보 1999년 12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