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손목시계

한때 귀한 선물로 각광을 받던 물건 가운데 신세가 급히 전락해 별로 탐탁지 않은 대접을 받는 것으로 만년필을 비롯한 볼펜 등 필기도구와 도장을 새길 상아,옥 그리고 라디오 등이 있다.파커,몽블랑 등의 상표는 지금도 위력을 발휘하고 있지만 그 정도 아닌 웬만한 만년필,볼펜도 문자 그대로 주어서 생색나고 받아서 흐뭇한 선물이었다.상아나 옥도 귀한 이름을 새기는 도장감으로 그만이었다.더 일찍 몰락했지만 라디오 또한 70년대까지는 상당한 귀물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것을 누구한테 선사한다면 보통 시대착오적인 것이 아니다.솔직히 말해서 반가워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컴퓨터가 일반화하면서 필기도구의 쓸모가 현저히 줄었고 도장 역시 고급은커녕 나무도장도 별로 소용이 없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라디오는 더 말할 것 없다.각 방송국의 주파수를 식별하는 청취자도 드문 실정이다.이제 라디오가 없어도 TV,컴퓨터 덕으로 조금도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

물론 지금도 재산보존용 또는 투기용으로 막대한 가격이 매겨진 만년필,시계 등이 없는 건 아니다.그러나 그건 돈 많은 호사가들의 비현실적 취미의 일환이지 생활용품으로서는 이미 활력을 잃은 품목들이라 하겠다.

시계는 그야말로 세월무상을 절감케 하는 물건이 아닐 수 없다.70년대까지만 해도 중요한 재산목록이었다.서울대가 동숭동에서 관악산으로 이전할 때 대학로의 중국음식점이 자장면,우동값 대신 맡겨놓고 찾아가지 못한 학생들의 수많은 손목시계들을 박물관에 기증한 것만 보아도 과거의 그 현금가치를 짐작할 수 있다.버스나 열차에서 날치기가 시계를 낚아챌 때 손목이라도 제대로 보존하려면 눈물을 머금고 포기해야 하는 귀중품이었다.

결혼할 때 신부측이 신랑한테 보내는 예물은 거의 시계였다.롤렉스나 오메가 등의 밀수품,가짜가 극성을 떤 것도 그 때문이었다.그러나 80년대 들어 국산품이 품질과 물량에서 압도하면서 시계는 계산기와 더불어 노점상 몫이 되었다.오죽하면 시계와 계산기는 개수로 파는 것이 아니라 한 되,두 되 등 되 단위로 판다는 농담이 나왔을까.

웬만한 집에는 어떤 형태로든 시계가 10개 안팎일 정도가 되었다.너무 흔해 귀한 줄을 모른다.그래도 손목시계만은 비교적 대접을 하며 어느 것이든 대부분 차고 다녔다.

그러나 이제는 그마저도 명맥을 보전하기 힘들게 되었다.휴대전화 보급이 급증하면서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손목시계를 착용하는 것이 급격히 줄고 있다.선물로도 이제는 눈총을 받을 지경이 되었다.만년필,계산기,라디오 등과 같은 신세가 된 것이다.시계업체들도 이에 따라 생산규모를 조절하느라 애를 먹고 있다는 소식이다.격세지감이 들지 않을 수 없다.

--------------------------------
박연호 국민일보 논설위원 2000년 04월 0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