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일은 텔레비전 끄는 날

환경월간잡지 ‘작은 것이 아름답다’(약칭 ‘작아’)가 펼치고 있는 단순하고 소박한 삶 운동 일정에 따르면 3월1일은 각 가정의 TV를 끄는 날이다.인간들의 끊임없는 파괴적 소비활동으로 지친 지구에 휴식을 주고, 하루하루 쫓기며 살아가는 인간들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자연의 흐름에 몸을 맡기길 권하는 이 운동의 실천항목은 TV 끄기 외에도 여러 가지다.

이미 지난 1월5일과 2월1일 실천에 옮긴 바 있는 ‘아무 것도 사지 않는 날’ ‘웃는 날’을 비롯 ‘시계 보지 않는 날’ ‘아무 것도 읽지 않는 날’ ‘세제 쓰지 않는 날’ ‘전화 쓰지 않는 날’ ‘침묵의 날’ ‘단식의 날’ 등이 12월까지 잡혀 있다.급물살을 이루는 생활의 소용돌이에서 하루 쯤 이런 것들과 단절된 상태로 지내면서 자신을 돌아보면 분명 평소에 몰랐던 소중한 것을 발견하게 되리라는 것이다.TV 끄기는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것을 우리에게 돌려줄지 모른다.

그렇다고 TV를 없애자는 말은 아니다.그렇게 할 수도 없다.이미 생활의 필수품으로 확실히 자리잡았기 때문이다.대신 적절하게 활용해 우리의 삶을 보다 풍부하게 할 방법을 찾자는 것이다.

먼 곳의 친지,친구 등 보고 싶은 이들을 찾아나섰던 사람들은 한두번쯤 겪어보았을 것이다.오랜만에 만나 고단한 세상 살아가는 얘기를 주고 받고,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새로운 용기를 얻어가지고 돌아오리라던 길이 굉장히 피곤하기만 한 경험을.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반가운 나머지 밤새 술을 퍼마셔 피로가 가시지 않은 경우,예상 밖으로 혹독한 삶에 지친 친구의 모습을 보고 안쓰러워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일 등 가지가지다.그러나 이런 것들은 사람냄새 섞인 아픔이라 시간이 지나면 극복할 수 있고 잘하면 아름다운 기억으로 뒷날 저장될 건수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고 이해하려 해도 씁쓸하게 남은 것이 있다. 바로 TV다.우리들 일상의 속살 속에 TV가 얼마나 깊이 박혀 있는지 생각조차 못했던 사람도 이같은 여행의 뒤끝에서 깨달을 것이다.그 중독증세가 여간 심한 게 아니다.

예전에 늘 마음만 먹었지 쉽게 실행에 옮기지 못하던 터에 고교 은사를 찾아간 적이 있다.선생님도 제자의 방문을 간절히 바랐고 기자 역시 가슴 벅차도록 꿈꾸던 기회였다.지칠 대로 지친 나날의 삶에 스승은 부모처럼 포근하고 안온한 휴식처였다.그러니 만남의 첫 대목은 감동과 흥분 그 자체가 아닐 수 없었다.아,고향이란 얼마나 따뜻한가.

그러나 저녁을 먹고 나서부터 그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예상도 못했던 고역을 치러야 했다.TV를 켜시더니 선생님과 사모님이 좋아하는 연속극 등 각종 프로그램을 쉬지 않고 시청했다. 간간이 말씀을 건네셨지만 대화가 이어지지 않아 형식적 대답이 나갈 수밖에 없었다.선생님과 사모님 역시 진지한 대답을 기대하신 것이 아니라서 건성으로 들으며 눈은 화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채널을 바꿔가며 두 분이 화면여행을 끝내니 자정이 가까웠다. 선생님은 만족하신 표정으로 잠자리에 들었지만 제자는 그걸 참고 견딘 고역의 여운이 쉽게 가시지 않아 잠도 제대로 못자고 뒤척이다 아침 일찍 서울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는 결코 특별한 사례가 아니다.주인 또는 손님으로서 누구든지 경험했을 것이다.대부분의 집을 보면 손님이 와도 TV 끌 생각을 하지 않는다.어떤 집은 소리마저 커 도무지 말을 하거나 들을 수가 없다.

찾아온 사람이 있는데 거들떠보지도 않고 책이나 신문을 읽는다면 그 관계는 곧 끝장나고 말 것이다.하지만 TV는 계속 켜 놓아도 이상하지 않다.아니 그렇다고들 생각할 따름이다.더 극단으로 말하면 당신과 할 말이 없으니 빨리 가라는 신호나 다름없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피차가 넘기는 것이다.그만큼 TV중독증세가 중증에 이르렀다.

‘작아’의 취지에 따라 하루만이라도 TV를 끄고 지내 보자.그리고 자신을 들여다보자.하필이면 공휴일에다 선현들의 얼을 되살리는 3·1절에 그러느냐고 할지 모른다.하지만 요즘 TV화면을 누비는 정치꾼들이나 못난 후손들을 보면 조상들도 차라리 화면을 외면하고 싶을 거다.그들과 같이 화면에 나서는 것 자체를 거부할 것이다.그리고 이른바 정치의 계절이란 점을 감안,3월 한달 아니 총선 때까지 TV 끄기를 후손들에게 당부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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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호 국민일보 논설위원 ynhp@kukminilbo.co.kr
2000년 03월 0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