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과 일그러진 우리 모습

3·15부정선거와 4·19혁명을 2∼3개월 앞둔 1960년 1월26일 서울역에서 철도사상 처음의 대형참사가 발생했다.설을 쇠러 가던 귀성객들이 서울역 3번홈 계단에서 엎치고 덮치며 짓밟히다 31명이 죽고 41명이 중경상을 입은 것이다.대형사고가 빈발한 요즘에 비추어도 적지 않은 참사였으니 당시로서는 엄청난 사고가 아닐 수 없었다.

지금처럼 뉴스가 빨리 전해지던 시절이 아니라 서울로 간 자식이 오기를 기다리던 집들은 내려오는 열차마다 깜냥껏 직접 확인해야 했다.사고 원인 같은 것은 대수롭지 않던 때였다.엄청난 인파가 몰린 계단에서 누군가가 갑자기 뛰니 까닭도 모르고 모두들 덩달아 뛰다 발생한 참사였으니 시쳇말로 안전불감증이 빚은 인재(人災)였다.시민들의 무질서와 당국의 무책임이 빚어낸 사고였지만 민도가 낮고 관청의 서슬이 퍼렇던 때라 더 이상 문제되지 않고 지나갔다.

만약 그때 이를 계기로 철저한 질서의식을 고취하고 행정이 시민위주로 전환되었다면 얼마나 달라졌을까.물론 이는 지금도 현실성이 희박한 가정이지만 그래도 밀어붙였다면 그 뒤로도 해마다 설과 추석 그리고 휴가철에 되풀이되는 무질서와 사고를 상당히 막았을 것이다.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는 그 당시 질서의식수준에서 별로 나아가지 못했다. 철도가 주종을 이루던 그때와 달리 고속버스,자가용,비행기 등이 승객을 분담하고 있지만 시민의식은 오십보백보로 명절 때마다 추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60년대 중반 귀성객들이 몰려든 서울역은 그야말로 지옥이자 야만의 광기가 춤추던 곳으로, 언제 그런 참사가 있었느냐는 듯 아수라장을 이루었다.예매제도가 없던 시절이라 차표를 사는데 목숨을 걸다시피 했고, 열차를 타기 위해 광장에서 기다리는 동안은 전쟁터 포로가 무색할 지경이었다.귀성객들을 정리한답시고 나온 이른바 안내원들이 폭력배처럼 긴 장대와 몽둥이를 들고 닥치는대로 패고 밟았다.열차가 모두 출발하고 난 자정 무렵 역광장에 널린 귀성객들의 멀쩡한 신발, 선물꾸러기들이 그 만행을 증언했다.고향보다 그들의 폭력을 피해 정신없이 기차로 도망간 꼴이었다.

그 무렵 대학생이었던 기자는 그렇게 비인간적 모욕을 겪으면서까지 차를 타고 싶지 않아 귀향을 포기했고, 그 이후도 별로 나아진 기색을 발견하지 못해 명절 귀향은 시들해졌다.물론 직업상 쉬지 못한 것도 큰 원인이었지만.뒤에 예매제도가 생기고 여러 가지 교통편이 늘었지만 표 구하기는 여전히 쉽지 않다.그에 투자해야 할 시간과 발 품이 적지 않은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요즘은 서울역에 아무리 귀성객이 몰려들어도 미개한 나라의 난민수용소를 연상케 하던 광경은 볼 수 없다. 예매한 표를 가지고 정해진 열차의 좌석에 앉으면 되니까. 고속버스도 길이 막혀 회차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운행에 차질이 생길 뿐 별로 문제될 건 없다. 비행기도 예약한 승객들이 아무런 통보도 없이 나타나지 않는 몰상식한 일부 승객들을 제외하면 그런대로 넘어갈 수 있다.

그렇다면 40년전 서울역 압사사건의 원인이던 시민의 무질서,당국의 서비스 미흡은 사라졌고 예약문화는 정착되었는가.이에 대해 그렇다고 자신있게 장담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귀성객중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자가용 이용자들 가운데서 외형은 달라졌지만 원형은 같은 무질서 형태가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다. 과속,무단추월,급차로 변경,갓길 얌체운행 등으로 대형사고 위험성을 높이는 사람들이 적지 않으며 이런 이들일수록 아무데나 쓰레기를 버린다.이번 설 연휴에도 그걸 신고하면 포상한다는 당국의 방침이 이를 뒷받침한다.

비행기 표 예약을 해놓고 전화 한 통 없이 나타나지 않는 사람들도 줄어들지 않고 있다.예전의 못된 습성은 버리지 않고 새로운 악습은 금방 체득하니 신기하기까지 하다.그리고 남들 줄서서 예약할 때 가만있다가 뒤에 연줄이나 백을 동원해 구하는 걸 실력으로 착각하는 속물근성이 강하다.

지난 40년 동안 귀향길을 비롯한 곳곳에서 우리의 시민의식은 별로 나아지지 않은 것이다.오히려 안전불감증으로 인한 대형사고는 날로 늘고, 문명의 이기 발달로 새로운 무질서와 무례함이 옛 것에 덧붙여 속속 등장하고 있다.으스대고 잘난 체하려는 속물근성도 새 시대에 맞게 선진화(?)한 모습으로 바뀌었다.명절과 귀성,귀경길에서 이런 것이 집약적으로 드러난다.이제는 달라질 때가 된 것 같은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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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호 국민일보 논설위원
국민일보 2000년 02월 0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