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직한 주책

70대 중반의 퇴임교수가 가는 곳마다 아슬아슬한 언사를 예사로 한다.점심이라도 같이 하다 정치 이야기가 나오면 그 주변에 있는 손님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3김씨 중 누군가를 혹독하게 비난한다. 그분은 3김씨를 다 싫어하기 때문에 비난 대상자는 그날의 화제에 따라 달라진다.그럴 때 옆 좌석의 사람들이 견해가 같으면 다행이지만 아닐 경우는 분위기가 험악해진다.

또 그 연배에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활동범위가 넓고 간여하는 바가 많다.여권과 비자가 필요하면 여행사에 맡겨도 될 것을 스스로 직접 절차를 밟는가 하면 동사무소,우체국 등에 볼일이 있으면 싫은 내색 없이 일일이 처리하고 다닌다.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사소한 것이라도 비능률적이고 불합리하다 싶으면 참지 못하고 정면돌파하여 기어코 시정하거나 앞으로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아 둔다.음식점, 지하철, 버스 등에서도 마찬가지다.하여튼 가는 곳, 만나는 일마다 온당하고 합리적이지 않으면 절대 그냥 보아 넘기지 않는다.

“늙으니까 잔소리가 많아지고 주책이나 떨고 다닌다고 할 거야. 무리가 아니지.나도 예전에 스승이나 선배들이 그러면 속으로 짜증을 냈으니까” 그러나 자신이 그 나이에 이르니 달라지더라는 것이다. 고령자들의 일반적 현상이 아니라 자신만의 특수한 예일지 모르겠다고 하지만 그분의 설명에는 동의할 만한 부분이 충분히 있다.

한국에서 가장이 된다는 것은 매사에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굴레이기도 하다.그분 역시 부당하고 속이 뒤틀려도 처자식을 위해 참고 굴욕도 감수하는 것을 평생을 통해 체득하고 실행해 왔다.그러다 보니 어디서든지 자신을 주장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체질화했다.

대학교수직이 갖는 사회 경제적 지위를 고려하면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았다는 것이다.독재정권이 들어서 학교를 비롯한 사회전체가 경색되면 교수이기 때문에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할 일이 너무 많았고, 자칫하면 개인은 물론 가족들까지 파멸에 이르는 것이 두려워 싫다 좋다를 양심적으로 표현할 수 없었다.

거기에 익숙해지다 보니 사회 곳곳에서 시민, 소비자로서의 권익이 침해를 받아도 똑바로 눈 한번 부릅떠 보지 못한 것이다.그것이 직장과 자신에게 무슨 해독이 되어 돌아올지 모르기 때문이다.밖에서 그처럼 소신과 먼 생활을 하는 처지에 집안에서라고 당당할 리 있겠는가. 따라서 가정, 직장, 사회에서 소신이나 주장 같은 것은 접어두고 살아왔다.

“그러나 그게 아니야.정년퇴임, 자식들 결혼 등 가장으로서 해야 할 일들을 끝내고 나니 생각이 달라져.거칠 게 없어진 때문이지. 그렇게 홀가분해지니까 전에 눈감고 지났던 일들이 이제는 거슬리면 참을 수 없어.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막가파 노인이 된 거야” 그래서 보는 것, 닥치는 것마다 시시비비를 따지고 드니 부인과 자식, 주변 사람들이 주책이라고 한다.하지만 자기만 그런 게 아니라 동료들 중에서도 비슷한 생각과 행동을 한 사람이 적지 않더라는 것이다.

따라서 노인이 되면서 잔소리가 늘고 주책을 부린다고 흔히 비쭉거리는데 그런 사람들을 생각해보라고 했다.실제 그분이 그렇게 시시콜콜 간여한 때문에 작으나마 시정된 일이 꽤 된다.즉 이제는 이것저것 눈치볼 필요가 없는 노인들의 직설적 언행과 시비가 사회의 구석구석에서 긍정적인 에너지로 거듭나는 것이다.

정의감과 소신을 젊은 날 적극적으로 표출하지 않고 이제야 그러는 건 비겁하지 않느냐고 비난할 수도 있다.그러나 여기서는 그 태도의 정당성을 논의하는 것이 아니므로 별개다.젊은 날을 어떻게 보냈건 이제는 부담없이 시비곡직을 따지는 자체에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올해로 우리나라도 65세 이상이 전 인구의 7%를 차지하는 고령화사회로 진입한다.그래서 여러 가지 노인대책이 강구되고 있는데 대부분 부양문제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이처럼 사회발전 및 개선의 동력이 될 수 있는 부분은 노인의 주책이니 망발이니 해서 도외시되고 있다. 에너지로 재활용할 가치가 있는데도 말이다.

이분 같은 사람이 고령인구 중 얼마 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조직화, 연대화하면 강력한 힘이 될 것이다. 노인들의 이처럼 건전한 주책을 체계화하고 활용하여 혼탁한 정치·경제·사회 등 각 분야의 앞날을 조금이나마 밝혀야 한다. 집단 매도 대상이 됐던 아줌마들이 지난해 궐기해 나라의 기둥임을 자처하며 바른 사회 건설에 이바지하고 있듯이, 고령자들의 능력도 이처럼 재활용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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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호 국민일보 논설위원
국민일보 2000년 02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