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풍에 걸맞은 내실을

지난 4·13 총선 이틀 전 영국 방송 BBC는 한국 선거에서 인터넷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며 2년 남짓한 사이 세계에서 컴퓨터 가독률이 가장 높아진 나라가 한국이라고 보도했다.이어 선거 다음 날은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가 시민연대의 낙선운동 위주로 보도하며 한국 인터넷의 힘과 아시아 다른 나라에 미칠 영향을 진단했다.프랑스의 르몽드도 25일 인터넷 사용이 활발한 대표적 국가로 한국을 꼽으며 인터넷 인구가 올해 안에 총 인구의 절반에 근접하는 2000만명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대체로 맞는 지적들이다.국내 한 여론조사기관이 실시한 조사에서도 한 달에 평균 90만명씩 인터넷 이용자가 늘어 3월말 현재 총 1400만명에 이른 것으로 나타났다.얼마 전 미국의 알렉사닷컴이 집계한 결과에서도 인터넷 도메인 등록 수와 접속량이 많은 사이트 수에서 한국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를,도시 가운데 서울은 도메인 등록 건수 1위(미국도시 제외한 전세계)를 차지했다.인터넷으로 은행거래를 하는 인터넷뱅킹 이용자 역시 현재 47만명인데 하루에 4000명씩 증가하고 있다.

르몽드가 보도한 것처럼 열풍이라 해도 전혀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몇 달 전 조흥은행이 본점 간판에 홈페이지 주소를 크게 새겨 넣은 것을 비롯해 거리의 광고,간판 등에 웹사이트 주소,E메일 주소를 알려 놓은 것을 흔히 보게 되었다.무슨 무슨 산에서 수십년간 도를 닦고 하산했다는 점쟁이 광고에도 웹사이트 주소는 반드시 적혀 있다.사주,관상쟁이도 인터넷을 이용하지 않고는 장사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는 반증이라 하겠다.

사람들의 명함에도 주소,전화번호,휴대전화 번호 외에 홈페이지와 E메일 주소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아니 주소나 전화번호보다 더욱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가고 있다.최근 김대중 대통령의 E메일 주소 공개가 갖는 상징성은 이런 것들을 여러 가지로 잘 설명해주고 있다.지하철,버스 등의 광고도 인터넷과 관련된 것이 많다.검색엔진,브라우저,강습학원 광고들이 넘쳐난다.인터넷에서 깨어나고 인터넷에서 잠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1세기는 정보화사회로 정보가 곧 힘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현상이라 하겠다.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의 인터넷 열풍을 외국의 유력 언론들까지 보도하는 것이 싫지는 않다.인터넷 강국이야말로 세계 각국이 추구하는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외형에 걸맞은 실속을 갖추고 있는가 하는 점을 우리 스스로 물어볼 필요가 있다.아시아만 해도 일본의 경우 우리처럼 요란하지 않은 대신 정보산업의 인프라를 몇십년 계획으로 꾸준히 구축하고 있는 곳이 많다.인터넷 이용자가 아무리 많아도 그들이 찾는 자료나 이용시설이 부실하면 그것은 빈 수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정보화에서 세계 선두를 달리고 있는 싱가포르는 소프트웨어 개발에서도 단연 앞장서서 많은 수익을 올리고 있다.전문가들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그런 나라들에 비해 여러 면에서 매우 취약하다.

그렇다면 인터넷 이용자가 늘어난다고 해서 무작정 좋은 것만은 아니다.외국 것을 그만큼 많이 사용하니 돈이 나갈 수밖에 없다.필요한 자료를 찾으러 미국,영국,독일 등 선진국의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해야 하고 다른 나라의 소프트웨어를 사다 써야 하기 때문이다.

인터넷 인구의 급증에 맞춰 사이버공간의 내용물이 충실한지도 짚어봐야 할 것이다.공공기관을 비롯해 각 단체,개인들이 앞다투어 홈페이지를 만드는데 내용이 부실하거나 저질스러운 곳이 널려 있다.사기 등 범죄행각을 일삼는 이들을 제외하고도 그렇다.

인터넷을 통해 개개인 삶의 질을 높이고 사회의 생산성을 높일 때 정보화의 의의를 살리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사용자가 느는 것은 오히려 문제가 된다.우리의 지금 현상이 그와 무관하다고 자신있게 답변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사회환경의 급변이 주는 병리현상도 가볍게 보아넘겨서는 안된다.인간의 두뇌는 5만년 전에 비해 별로 달라지지 않았는데 정보의 양과 처리속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증가,이 불균형이 빚는 부작용은 심각할 수밖에 없다.육체는 그대로인 채 정신에만 속도를 가하여 사이버공간을 넘나드는 육체와 정신의 분리는 상상 이상의 스트레스를 유발한다고 전문가들은 우려한다.

그렇다고 과거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오히려 모든 국민이 인터넷 이용자가 되도록 각종 촉진방법이 나와야 한다.하지만 외형에 맞는 내실을 기해 부작용은 최소화하고 긍정적 효과는 최대화하도록 국가와 네티즌 개개인이 노력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정보화사회는 산업사회보다 더 많은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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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호 국민일보 논설위원 ynhp@kmib.co.kr

국민일보 2000.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