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여제 루이

프로바둑 기전에 출전한 기사에게 오늘 전적이 어땠느냐고 물으면 “상대가 여류기사였어요”라고 할 경우가 있다.이는 물어보나마나 이겼다는 우회적 표현이다.여류기사들이 잘 하지만 그래도 남성과 맞대결하기에는 무리라는 뜻이 담겨 있다.앞을 멀리 내다보고 다음 수를 깊이 모색해야 하는 바둑은 체질적으로 여성과 맞지 않다는 남성들의 편견과 짧은 역사 때문에 그처럼 왜곡된 평가를 받아왔다.그래서 여류기사는 바둑계의 꽃 또는 조미료 정도로 잘못 생각하는 이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제43기 국수에 한국기원 소속 루이 나이웨이 9단이 등극했다.세계바둑사상 최초로 여자황제가 탄생한 것이다.여류기사들끼리 하는 기전의 여왕은 많이 있다.그러나 남녀가 당당하게 맞붙은 결승에서 이렇게 통쾌하게 우승한 적은 없다.

루이 9단이 세계 최고의 이창호 9단을 물리치고 조훈현 국수한테 도전장을 내자 한 원로기사가 “만약 루이가 국수위를 차지하게 되면 우리나라 남자기사들한테 가위를 하나씩 선물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는데 그게 현실로 나타나게 되었다.물론 이 농담은 여성을 비하하거나 속좁은 남성 우월주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루이 9단의 투혼이 대견하고 자랑스러운 반면 그녀 앞에서 맥없이 떨어져 나간 남성기사들의 분발을 촉구하는 애정어린 채찍이었다.

국수위는 60년대 중반 조남철 아성을 신예 김인이 쓰러뜨린 이후 서봉수 조훈현 이창호 등 몇 명 외에는 앉아보지 못했다.번번이 그들의 철통수비에 막혀 좌절한 것이다.이처럼 바둑 권좌가 몇 사람에 의해 과점현상을 빚자 식상한 팬들의 교체요구는 날로 거세졌다.

그러나 뭔가를 좀 이루어 주리라고 기대했던 유망주들이 조훈현 이창호의 벽에 계속 부딪치자 먼 훗날로 기대를 미루는 팬들이 많아지고 이는 바둑계의 열기 냉각으로 이어졌다.루이 9단이 여기에 활력을 불어넣은 것이다.그녀의 기쁨이자 바둑계 경사가 아닐 수 없다.

한편 중국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을 떠나 미국 일본 등지를 떠돈 바둑 집시 부부 장주주 9단과 루이 9단을 받아 준 한국기원의 넉넉한 태도 역시 그녀의 이번 등극으로 높이 평가받게 됐다.한국 일본의 여류바둑 실력이 아직 낮아 그녀의 독무대가 되리라는 우려가 양국에서 걸림돌로 작용했으나 우리는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 결과 우리 여류 바둑계도 일취월장하여 조혜연 박지은 권효진 이지연 등 많은 신예들이 각종 기전에서 남자 기사들과 대결을 벌여 좋은 성적을 올리고 있다.루이 같은 좋은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루이를 비롯한 그녀들의 더 많은 승전보가 이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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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호 논설위원 ynhp@kukminilbo.co.kr
2000년 02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