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틈이 자신의 재고조사를
한 학생이 문제를 털어놓으며 불평했다. " 집은 좁은데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4남 2녀가 함께 살기 때문에 너무 힘들어요. 항상 북적거려 숙제나 하고 싶은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어 요. 더 이상 참다가는 미치고 말 거예요" 카운슬러 선생님은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며 개를 한 마리 사다가 기르라고 했다. 학생은 속으로 투덜댔다. "그러잖아도 복잡한 집에서 개까지 기르라니" 다음날 개가 도움은커녕 더 정신 없게 한다고 호소했다. "그럼 이번에는 친척들을 초대해 서 며칠동안 같이 지내자고 해요. 참 고양이도 한 마리 사고" 학생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 다면서도 시키는대로 했다. "집안은 완전히 시장바닥이예요. 잘 자리도 없어 거실 한 구석에서 아무렇게나 쓰러져 잤 어요" 상담교사를 다시 찾아가 학생은 항의했다. "그럼 이번에는 친구들을 불러들이세요" 학생은 엉뚱한 처방만 내놓는 상담교사한테 더욱 화가 났다. "저 선생님은 아무래도 제 정신이 아니야" 그는 중얼거리면서도 친구들을 초대했다. 집안 은 송곳 하나 꽂을 자리도 없게 됐다. 학생이 집밖으로 나가야 할 판국이 되었다. 화가 잔뜩 치민 학생에게 상담교사는 그러면 친구들을 돌려보내라고 했다. 그리고 다음날 학생을 불러 어떤지 물었다. " 훨씬 넓어졌어요. 이제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을 것 같아요" 선생은 이어서 친척들을 모두 돌려 보내라고 했다. "선생님 말씀이 맞아요. 그들이 돌아가니 집안이 그렇게 넓을 수 없어요. 역시 선생님은 유능한 카운슬러예요." "고마워요. 이제는 개와 고양이도 팔아 버리세요" 다음날 학생은 자기 집이 축구장처럼 넓다며 좋아서 어쩔 줄 몰라했다. "숙제 뿐만 아니라 무슨 일이든 즐겁게 할 수 있게 됐어요. 선생님 아니면 집이 이처럼 넓어질 수 없었을 거예 요"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는 생각했다. "이상하지. 집은 그대로고 식구도 예전처럼 여덟 인데 이렇게 넓어지다니... 상담선생님은 마술사인가 봐" 미국의 기초영어 학습서에 나오는 이야기다. 우스운 이야기를 읽으면서 영어를 익히라고 제작한 것이다. 결국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주변 상황을 즐겁게 받아들이고 행복을 손에 쥐게 된 어린 학생의 순진무구함에 누구나 웃지 않을 수 없다. 바라던 것이 그렇게 가까이 있는 것을. 이는 단순한 우스개가 아니라 갈수록 세상살이가 팍팍한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인생은 괴로움의 바다요 지뢰밭이라는 진부한 말을 되새기지 않아도 서민들 대부분에게는 삶 자체가 형벌 같은 세상이다. 실직, 도산의 위협이 항시 문 앞에서 넘실거리며 건강, 사랑, 희망 같은 것들은 아차 하는 순간에 엉망이 되거나 증발해버리는 고단한 나날이다. 아무리 돌아봐도 출구가 막혀 막막한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그럴 경우 우리는 대체로 자기 처지를 한탄하며 쉽게 좌절한다. 왜 내게는 이렇다할 것이 없는가. 돈, 연줄 그밖에 남다른 능력이 다른 사람들처럼 있는 것도 아니니 이 고비를 어떻 게 넘길 것인가. 남은 건 절망밖에 없고 앞을 가로막는 건 절벽이다. 그럴 때 대부분 그냥 주저앉고 만다. 하지만 너무 허망하지 않는가. 어렵고 힘들지만 다시 한번 기운을 추스려 보 자.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정말 내게는 아무 것도 없는가. 면밀히 살피고 철저히 훑어보면 자신도 모르고 있었거나 잊고 있었던 뭔가 있을 것이다. 성적위주의 잘못된 교육제도와 돈이 전부인 물신주의의 잣 대로 재면 보잘 것 없는 내 안에도 무언가 있을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누구도 완전한 빈 털터리는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동안 방치되어 있거나 가지고서도 그 의미를 몰랐던 자기 안의 능력을 재발견, 재확인하는 이른바 자신의 재고조사를 냉정하게 해보자. 건강은 어떤가. 먹고 사느라 바빠 서 남다른 재주 또는 취미를 버려두지는 않았는가. 이미 내가 가지고 있는데도 집이 좁다고 불평한 학생처럼 모르고 있는 것은 없는가. 그런 것들을 뭐든지 창고 구석에서 꺼내 놓고 보면 틀림없이 새로운 용기와 투지가 살아날 것이다. 파랑새를 찾아 헤매던 치르치르와 미르치르가 정작 자기 집 집 새장에서 그걸 발견하고, 봄을 찾아 산천을 떠돌던 스님이 집안의 나무 끝에서 무르익은 봄을 본 것처럼 내 안에 있 어도 모르는 나친 것이 우리에게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자신의 힘으로 찾기 어려우면 그 학생처럼 상담자를 만나 조언을 구하면 된다. 누군가 말했듯이 인생은 자기한테 일어나는 일 10%와 그에 대한 반응 90%로 이루어졌다. 즉 세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처해나가느냐에 승패가 달려있다는 것이다. 인생은 화투나 포커와 같다는 말과도 다를 바 없다. 얼마나 좋은 패를 들었느냐 보다는 그걸 가지고 어떻 게 치느냐가 승패의 핵심이라는 말이다.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의 능력이 얼핏 보면 별 거 아니거나 승산이 없어 보일 때가 많다. 그럴 때일수록 쉽게 포기하지 말고 자기 안의 재고를 철저히 파악하자. 잘 보면 피박, 광박 을 면하는 것은 물론이고 남보다 먼저 스톱을 부를 묘수가 없으란 법도 없다. --------------------------------- 박연호 국민일보 논설위원 ynhp@kmib.co.kr 고속도로공단 '새길' 87호 2000 --------------------------------- http://columnist.org 서울칼럼니스트모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