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운 유권자들

“지금까지 나는 열네 번 출마했는데 선거 한 번에 목숨을 한 달씩 감수했다.우리의 짧은 생애를 생각할 때 이렇게 힘든 말싸움으로 14개월을 헛되이 보낸 생각을 하면 우울해진다” 윈스턴 처칠의 말이다.

민주주의의 본산인 영국에서도 출마에서 당선까지가 얼마나 힘든지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라 하겠다.하물며 민주주의 후진국인 우리나라에서야 오죽하랴.짧게는 몇 개월,길게는 4년 전부터 이번 총선을 준비하고 분투해온 모든 후보자 여러분의 노고를 치하하지 않을 수 없다.

선거법과 시민단체들은 공정하고 양심적인 선거운동을 하라고 다그치는 반면 아직도 구태에서 헤어나지 못한 선거브로커와 일부 유권자들이 금품과 향응을 요구하는 모순된 상황에서 마음고생은 얼마나 많았겠는가.또 나라를 위한 순수한 열정이 사리사욕,파렴치로 매도당할 때도 없지 않았을 터이니 얼마나 분하고 억울했겠는가.

그러나 유권자들도 후보자들 못지않게 괴롭고 소태 씹은 맛이다.투표에 참가해도 그렇고 기권하려 해도 비슷하다.정치가 국민을 고문하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정치권과 후보자,운동원들은 열기가 달아올랐겠지만 투표를 코앞에 둔 시점까지 일반인들은 어느 선거 때보다도 담담하다.그것이 곧 정치에 대한 무관심은 아니겠지만 사람들이 모인 대부분의 자리에서 선거가 화제에 오르는 것은 과거에 비해 확실히 드물다.뿐만 아니라 지지를 호소하는 확성기 소리에도 짜증을 내는 사람이 많다.

서민들은 일차적 원인으로 경제불황을 꼽는다.증시니 코스닥이니 해서 떼부자가 속출하고,여기저기서 흥청거리지만 영세업자와 서민들은 이제야 IMF의 진짜 맛을 보는 것 같다고 아우성이다.이처럼 내 형편이 고단한데 말만 번지르르한 정치인들의 호소가 귀에 들어올 턱이 없다.

선거에 관심은 있어도 투표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 또한 적지 않다.그들은 대개 자기 지역에서 자신있게 지지할 후보자가 없는 유권자들이다.병역,납세,전과 등의 문제로 시민단체들이 낙선 대상자로 지목한 후보가 두명 이상인 지역구의 경우 더욱 괴롭다.그러니 선거를 화제로 삼을 흥미가 있겠는가.

지지 후보가 확실한 유권자들 가운데서도 투표 참가 여부를 결정짓지 못한 이가 적지 않다.이들은 지역감정,학연,혈연 등에 얽혀 맹목적으로 투표하는 사람들과 성향이 근본적으로 다르다.최소한 누가 국정 운영에 도움이 되겠는지를 가늠해보는 수준급의 유권자들이다.

예컨대 A당의 a후보를 적임자로 점찍었다.투표날 거기에 찍는 걸로 끝난다면 마음이 홀가분하다.그러나 그게 아니다.그 정당의 전국구 후보를 보면 정나미가 뚝 떨어지는 인물이 여러 명,그것도 상위 순번에 포진하고 있으면 투표장에 갈 마음이 싹 사라진다.시민단체들이 부적격자로 거명한 후보가 대부분이지만 거기에 해당되지 않아도 국회의원이 되어서는 안 될 사람이 있다.

병역,납세 의무 잘 이행하고 드러난 전과는 없지만 무소신,일관된 아첨으로 가신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하루 아침에 말을 바꾸고 이 정당 저 정당을 기웃거리며 해바라기만 해온 이들,사생활이 문란한 이도 적지 않다.지역구도 마찬가지다.부적격자로 거명된 사람들보다 더 괘씸해서 기권하겠다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곳곳에서 들린다.

이래저래 투표장에 나갈 마음이 사라지는 것이다.정치권이 교묘하게 유권자를 우롱하고 고문하고 있다는 생각까지 하며 분노를 참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그도 그럴 것이 맹목적 가신,무소신과 아첨파,시민단체들이 지목한 부적격자들을 지역감정에 편승시켜 해당 지역에 공천하고 나머지는 전국구 당선권에 밀어넣은 것이다.지역감정과 순수한 자기당 지지자들을 볼모로 한 의석사냥이다.

이래서 유권자들도 후보자 여러분 못지않게 선거가 혐오스럽고 괴롭다.이 때문에 아직도 투표장에 가기를 망설이는 사람이 많다.그러나 국회라는 것이 없어지지 않는 한 싫어도 국민과 관련이 있으니 기권할 수도 없다.

따라서 가능하면 나가서 선택하도록 하자.입맛이 없지만 굶을 수는 없어 어딘가에 마지못해 젓가락 대는 심정으로라도.그리고 애덤스의 말처럼 하자.“싫더라도 항상 원칙을 위해 투표하라.그러면 그대의 투표가 헛되지 않았다는 좋은 회상을 품게 될 것이다” 또 고민할 줄 아는 유권자들이 기권함으로써 자기가 가장 싫어나는 후보를 여의도로 보내는 결과를 빚는다는 사실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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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호 국민일보 논설위원 ynhp@kukminilbo.co.kr

국민일보 2000.0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