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해방구였던 형 갈천문
                           
 선배 갈천문과 후배 박연호. 하등 이상할 까닭이 없는데도 사람들은 물었다. 내가 연합통신
을 떠난 뒤라고는 하지만 둘이 그렇게 허물없이 자주 만나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럴만도 했다. 80년도 군부의 강압에 의해 출범한 연합통신 초기의 회사 분위기는 끔찍했
다. 동양통신과 합동통신을 억지로 합쳐놓았으니 출신회사가 다르면 자리를 같이 하기가 부
담스러웠고, 같은 회사 출신이라도 만남이 빈번하면 엉뚱한 소문이 퍼질 정도로 험악하고 
흉흉했다.업무적,공식적으로는 마지못해 어울렸지만 물밑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따라서 같은 
회사 동료가 차라리 남만 못한 경우도 있었다.

 나는 연합통신 출범 4년 5개월 뒤 다른 사로 옮겼다. 그 뒤에 갈선배와 내가 자주 어울리
게 된 것이다. 이제 회사가 다른 사이이므로 꺼리거나 남의 눈치 볼 일 없이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나 갈선배가 동양출신이고 내가 합동출신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
람들은 아무래도 이상하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또 선배의 품위, 능력, 용모 등에 비해 후배는 아무리 봐도 '천만의 말씀'인 탓인지 사뭇 시
빗조로 또는 위협조로 그 뿌리를 캐려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뿐만 아니라 비아냥이 섞인 추
궁도 있었다. 그걸 뒤집어 보면 어떻게 네까짓게 감히 그 양반과 그렇게 가까이 지낼 수 있
느냐는 말이었다. 틀림없이 남들이 모르는 떳떳치 못한 거래 등 좀 어둡고 냄새나는 그렇고 
그런 일이 있지 않느냐는 단정을 서슴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내가 연합통신을 떠날 무렵 갈선배는 편집상무였고 얼마 안 있어 감사를 맡으셨다. 다른 
신문사로 옮겨간 쫄병 후배가 그 직책과 연관이 있을 리 없으니 더욱 그랬다. 성미가 급한 
사람은 아주 노골적으로 묻기도 했다.

 갈선배는 이북 원산 출신이고 나는 목포 출신이니 지연도 아니었다. 중.고교 선후배 사이도 
아니었다. 갈선배와 같은 부에서 일을 한 적도 없었다. 편집국장을 하시던 시절이 그래도 업
무상 가장 근접한 시기였다. 그러나 문화부의 새까만 기자와 편집국장이 접할 일이 있으면 
얼마나 있었겠는가. 문화부,과학부 등 3개부를 모듬으로 불러 점심 한번 사준 기억밖에 없
다.

 이러니 한번 궁금했던 사람은 더더욱 알 수 없다는 눈치였다. 대학이 같은 점을 찾아낸 사
람도 있었다. 하지만 같은 과 선후배 의식도 희미한 그 학교에서 7년 이상 차이가 나는데다 
과도 다르니 그냥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50년대 학생잡지 [학원]에 갈선배는 중학시절부터 시를 발표했다. 그 잡지를 애독했기 때
문에 갈선배를 비롯한 많은 이들의 이름과 시를 외울 정도였다. 따라서 갈선배는 연합통신
에서 처음으로 만나기 이전부터 나에게 전혀 낯선 사람이 아니었다. 어느 날은 그 얘기 끝
에 나 역시 중고교시절 [학원]에 시를 발표했다는 사실을 아시고 한때는 '시나 쓰는 비행청
소년'이었군 하시며 웃으셨다. 그리고는 우리들의 '비행'을 다시 얘기한 적이 없다. 어린 시
절 한때의 치부가 드러나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것도 갈선배와 나를 묶어주는 
끈은 아니었다.    

 85년 5월 사표수리를 하느니 마느니 하는 3주간의 승강이 끝에 연합통신을 그만 둔 마지막 
날 인사를 갔다. 당시 갈선배는 편집국장을 그만 두고 무슨 위원인가를 맡고 계셨다. 작별인
사를 하니 예전과 달리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이제 시간상 여유가 있으신 때문인
지 다른 사로 떠나는 후배에 대한 아쉬움을 상당히 진하게 표출하셨다.

 그리고 한 마디 하셨다. "술 한잔 살테니 연락해"  아, 그런 말이 갖는 뜻을 모를 사람이 
어디 있을까. 길을 가다 어정쩡한 상대를 만나 할 말이 없으면 언제 소주나 한잔 합시다라
는 식의 인사말을 하루에도 몇번씩 하는 세상이 아닌가 말이다. 그래서 나간 대답이 "그걸 
진짜로 알고 기다리면 멍청하다고 혼나겠지요?"였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얼른 몰라 한참 
나를 보시더니 쥐어박을 듯한 자세를 취하며 읏으셨다. "그래 속아 봐.이 자야"

 그날 주고 받은 대화는 역시 인사치레와 가벼운 농담 이상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갈선배와 
나 사이의 끈이 어딘가에 남아 있었는지 두어달 뒤 어느 저녁 모임에서 마주쳤다. 그러나 
갈선배의 신분과 내 처지로 보아 인사 이상의 긴 얘기를 나눌 분위기는 아니었다. 먼저 나
가려니 "이 자야.어디 가는 거야?"하셨다. "주최측에 눈도장은 찍었으니 가야죠. 그리고 상
무님께서 한잔 사신다던 것도 이걸로 접수하겠습니다. 상두 술로 낯내는 것 같아 좀 미안하
시기는 하겠지만..." "뭐야? 이 친구가.  하하하.... 이리 따라와"

 갈선배도 그날 시간이 좀 헐렁했는지 부근 술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부담
없는 이런저런 얘기로 서로를 좀 더 알고 편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서로 입밖으로 표
현은 안 했지만 동시에 깨달았다. 연합통신 구성원들이 싫건 좋건 휘말려야 했던 그 갈등, 
중상, 비방의 질기디 질긴 그물에서 우리는 벗어나 있음을. 그럴 수밖에 없지 않는가. 아무
리 높은 분이라도 이제는 서로 회사가 다르니 불편하거나 부자연스런 일이 있을 턱이 없고 
남의 눈치를 볼 이유도 없었다. 

 개인적인 얘기가 주를 이루었다. 편하고 자유스러웠다. 일이 잘 되려고 그랬는지 그 이후 
여러 차례 그렇게 술을 마셨다. 서슬이 퍼렇던 당시 금서를 사려고 해당 서점을 찾아가는 
등 비밀스런 일을 몇 차례 같이 하고 나니 친밀감도 그에 비례했다. 어쩌다 문화부에 부탁
할 일이 있어도 다른 회사의 나에게 시킬 정도로 우리는 편해졌다. 갈선배의 약속이 갑자기 
무산되면 나한테 전화를 하여 같이 한잔 했고, 나 역시 생각이 나면 '오늘 약속 깨진 것이 
없느냐'고 완곡하게 요청하기도 했다. 성사율은 그리 높지 않았지만. 화제도 다양해졌다. 문
학,종교와 과학 등 약간 어지러운 것에서부터 음담패설까지 두루두루. 그런 것들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주고 받는 자유로움이 일상의 고달픔을 조금은 달래주었다. 

 그렇게 자유를 숨쉬는 기회가 많아지면서 호칭이 변하게 되었다. 그날도 술이 상당히 올라 
갈선배와 몸시 추운 골목길을 부끄럼없이(?) 당당하게 행진했다. 뭔가 얘기를 하던 중 갈선
배가 툭 한 마디를 던졌다. "이 자야. 그 상무님 소리 좀 안 할 수 없어."  "그럼 뭐라고 해
요. 이런 때 선배님,선배님 하면 그것도 분위기 깨지고..."  "그럼 형이라고 해"  "동생 자격
이 있어야죠" "그래 좀 미달이긴 하다만 달리 없잖아.하하하"  "사기꾼들이 물색한 상대한테 
맨 처음 하는 말이 뭔줄 아세요? '인간적으로 지냅시다' 예요. 그 다음은 '형님으로 모시겠
다'라던데 자칫하면 제가 그렇게 되겠네요" " 이 자야. 귀하는 이미 내 마음 등등 여러 가지
를 횡령했어.하하하"

 그렇게 형과 나는 술집에서, 만취한 밤길에서,어떤 때는 형집까지 쳐들어 가서 함께 힘겨운 
삶의 고삐를 풀고 자유를 숨쉬었다. 나중에는 실생활에서 부딪치는 어려움, 고통, 고민꺼리 
등에 대해서도 주저없이 형한테 털어놓게 되었다.

 형은 바로 내 삶의 해방구였다. 형을 만나는 시간과 공간에서 나는 긴장을 풀고 존재의 자
유와 심적 풍요를 누렸던 것이다. 우리는 일상의 크고 작은 억압과 부담들에서 벗어난 무장
해제 상태를 즐겼다. 즉 아무런 구애도 받지 않고 마음껏 호흡할 수 있는 비무장지역의 자
유인들이었다.

 형이 연합통신을 그만 두시면서 나는 형의 영역 속으로 좀 더 깊이 끌려 들어갔다. 형이 
다른 사람들과 만나는 자리에 합석을 시키는가 하면, 내 일상의 크고 작은 일에 자상하게 
구체적으로 관심을 가져주신 것이다. 

 그러나 사람 사이가 어찌 항시 좋을 수만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 사이는 표피적이고 형
식적, 의례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형과 나는 그 단계도 넘었다.어느 날 무슨 일
로 전화를 드렸더니 불같이 화를 내셨다. 심각한 내용이 아니라 약간 한가한 주제였다. 다른 
때와 달리 한참 꾸짖더니 목소리를 낮추셨다. "이 자야. 시간나면 술 살테니 그 때 화풀이
해. 오늘은 하지 말고." 그러나 형이 술을 별로 드시지 않던 때라 그럴 기회는 없었고 대신 
다른 일로 만나 나도 제법 투덜댔다. 형은 웃기만 했다. 그만큼 형과 나는 구체적이고 더욱  
편한 사이로 한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이러다가 정말 친형처럼 되면 어떻게 하지요.상상만 해도 끔찍하네." "하하하 이 자가 또.
자네는 그보다 더 골아픈 동생이 벌써 됐어. 그러니 각오해" 그래서 예전 연합통신 시절의 
어떤 일을 들추어내서 트집을 잡았다. 나도 형한테 반격할 수 있는지 시험해 본 것이다. 취
중이기는 했지만 형은 잘못을 인정했고 나는 의기양양했다. 그러나 그게 끝이었다. 더 이상 
형의 속을 썩이고 투덜댈 수 없게 되었다. 

 형님을 산에 남기고 돌아오던 날 나는 해방구에서 축출당해 또다시 유랑하는 들짐승이 되
었음을 통감했다. 그리고 밤이 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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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호

국민일보 논설위원 ynhp@kmib.co.kr
'언론인 갈천문 추모집'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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