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벌 없는 세상은

군입대가 곧 전사로 여겨지던 한국전쟁 무렵 부모들이 훈련소의 아들을 면회하러 가는 것은 단순한 재회가 아니고 장엄한 의식이었다.언제 한 줌의 재가 되어 돌아올지 아니면 실종으로 영영 생이별하게 될지 모르는 자식을 만나러 가는 부모들로서는 그렇지 않을 수 없었다.

챙겨갈 품목 중에서도 가장 귀한 것으로 온갖 공을 들인 선물은 단연 며느리였다.요즘 사람들은 그야 당연하지 않느냐고 할 것이다.나아가 마누라나 애인이 가면 됐지 왜 부모들이 나서느냐고 의아해 할지 모른다.

그건 요즘 세대의 생각이지 당시 사람들은 아들과 며느리의 사랑 같은 것은 한참 뒷전이었다.그럼에도 며느리를 정성껏 여러모로 꾸며서 데리고 간 것은 순전히 씨를 받기 위해서였다.손자를 아직 얻지 못하고 아들이 입대한 집은 말할 것도 없고 애가 있더라도 딸만 있는 집,손자가 한 둘 있지만 어쩐지 허전한 집 등은 며느리 대동이 필수였다.

면회장에서 훈련으로 곯고 고생한 아들의 배를 채워주는 일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면 근처 적당한 숲이나 외진 곳으로 아들과 며느리를 보내 짝짓기를 시켰다.전쟁터에서 언제 목숨을 잃을지 알 수 없는 아들의 씨를 받는 것이므로 염치,체면 같은 것은 사치에 불과했다.오히려 너도 나도 벌이는 당당한 행사였고 면회의 핵심 목표였다.

인간의 종족 보존과 번식 본능은 이처럼 절박하고 간절한 것이다.다른 동물들도 마찬가지다.TV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물의 생활에서 우리는 이를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전쟁의 소용돌이에서도 종족보존을 위해 그같이 치열하게 몸부림치는 인간이 바로 그 때문에 자신을 위협하는 모순과 어리석음을 자행하고 있다.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로 자기 생존의 기반을 붕괴시키고 있는 것이다.

최근 미국 CNN이 보도한 바에 따르면 인류의 식량 가운데 3분의 1을 차지하는 과일,채소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토종 꿀벌이 거의 멸종단계에 이르고 양봉도 30∼40% 줄었기 때문이다.

꿀벌은 나비 등 다른 곤충들과 함께 꽃의 가루받이에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아니 다른 어느 곤충보다도 공로가 크다.그런데 이들이 사라지면서 가루받이를 못하는 식물들이 늘어 곡물,감자,땅콩,오이,고추,거의 모든 과일 종류의 생산량이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그렇지 않아도 기상이변 등 숱한 재해로 농작물이 많은 피해를 보고 있는데 식물들의 씨받이까지 봉쇄돼 인간은 물론 모든 생물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식물들의 씨받이 노력은 훈련소에 며느리를 데리고 간 인간들 못지않게 처절하다.일생을 여기에 바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온갖 아름다운 색깔과 향기로 벌과 나비를 유혹,가루받이를 하는데 어떤 종류의 난초는 이도 모자라 동물들이 상대를 유혹하기 위해 사용하는 페로몬과 비슷한 사이비 물질까지 만들어 내뿜는다.

이는 정상적인 때의 일이다.땅이 좋지 않고 환경이 열악하면 빨리 꽃을 피워 대를 물려 주고 자신은 죽는다.길가나 시멘트 틈에 어쩌다 씨앗이 떨어져 간신히 뿌리를 박고 사는 화초,농작물이 제대로 자라지도 못한 채 꽃이 피고 이삭이 패는 것은 그 때문이다.화분에 심은 화초에 거의 말라죽을 때까지 물을 주지 않고 꼬챙이 등으로 자꾸 흙을 쑤셔 괴롭히다 물을 주면 금방 꽃이 피는 것도 마찬가지다.살기가 너무 힘드니 후손을 빨리 보고 죽겠다는 뜻이다.

이렇게 필사적으로 꽃을 피웠는데 벌,나비가 날아들지 않으면 식물은 종족이 끊긴 절망 가운데 그대로 죽고 만다.식물은 종족 보존에 실패하고 인간과 동물은 먹이가 그만큼 줄어드는 것이다.자신들의 종족보존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인간들이 그로 인해 먹이사슬 고리를 위협, 자신들의 생명 터전을 파괴시키는 모순을 초래한 것이다.

미국에서는 이 때문에 농부들이 벌통을 임대해 농작물의 가루받이를 하고 있는데 한 통당 80년대에 18달러 하던 것이 지금은 40달러를 넘었다.그만큼 생산비가 늘어난 것이다.환경을 파괴하지 않으면 공짜로 얻을 꿀벌의 노동에 이렇게 비싼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미국은 그래도 나은 편이다.경제력,기술력이 떨어져 토종 꿀벌,양봉 등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나라들의 장래는 심각하다.여기서도 빈익빈부익부의 틀이 생기는 것이다.이 문제에 대해 과학자들은 세계가 공동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경고하고 있다.이를 흘려 들어서는 안된다.벌과 나비 등 곤충들을 다시 불러들이도록 해야 한다.그것이 인간도 함께 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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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호 국민일보 논설위원 ynhp@kmib.co.kr

국민일보 2000.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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