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곬인생]인공위성 대국 꿈꾸는 채연석박사


「고막 찾아 3만리」.

들어서 기분 좋은 소리가 아니나 이것을 좌우명으로 30년 넘게 살아온 사람이 있다.

한국항공우주연구소 우주기반기술연구부장이자 과학로켓개발사업단장으로 있는 蔡連錫(채연석.49)박사는 어려서 로켓발사실험을 하다 한쪽 고막을 잃자 이런 좌우명을 내걸었다. 잃어버린 귀의 댓가를 찾겠다고 오늘도 바쁘다.

『어려서부터 로켓에 미쳐 이제 그 방면의 전문가로 나름대로 보람도 느낍니다만 아직 3만리까지 간 것은 아닙니다. 2005년 우리가 만든 과학위성을 우리가 만든 로켓으로 쏘아 올린다면 나라로써도 경사지만 저로써는 소년시절부터의 숙원이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1951년 충북 충주태생인 채연석이 로켓에 미치게 된 계기는 청주 석교국민학교시절 학교게시판 때문으로 기억한다. 운동장 한편의 대형 게시판에 그날 그날의 중요기사가 알기 쉽게 쓰여 있어 신문을 읽을 나이가 아닌데도 인공위성이나 대륙간탄도탄에 관심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채연석이 다른 국민학교를 다녔더라도 그의 지금 신분은 ○○공학자나 ××기능공 가운데 하나이리라. 그는 로켓기사를 읽기 전부터 기계를 다루고 뭔가를 만드는데 미쳤던 것이다.

『국민학교때는 자전거를 분해하고 조립하는 것이 너무 재미있었고 자랑스러웠어요. 어른이 되면 적어도 「자전거빵 사장」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자신도 붙구요.』

청주남중시절에는 과학교사가 이웃에 살았는데 자제가 없어선지 그를 친자식처럼 대했다. 선생님의 실험을 거들다보니 과학이 너무 재미 있었다.

과학교사의 가장 큰 선물은 그를 월간「학생과학」기자로 추천해준 것이다. 그는 「학생과학」을 공짜로 받았고 방학때는 전국의 과학시설들을 견학하게 됐다. 「학생과학」만으로는 양이 차지 않아 서점을 자주 드나들게 된 것도 이 때부터였다.

학습참고서류는 사지 않은채 로켓과 우주선에 관한 책이 있으면 돈부터 꺼냈다. 성적표에 로켓과목은 없어 우등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세광고에 진학하자 로켓클럽을 만들어 회장이 될 수는 있었다. 이 클럽은 몇달에 걸쳐 글라이더용 로켓을 만들자 청주의 무심천에서 실험을 했다. 그러나 이날 무심천은 무심하다 못해 잔인했다. 로켓엔진의 화약이 터져 오른쪽 고막은 찢어지고 왼쪽 고막은 5㎜나 구멍이 뚫렸다.

『학교측은 클럽활동을 중단시켰지만 회원들도 이미 흥미를 잃어버렸어요. 그럴수록 저는 더 전의가 불탔습니다. 그 고막을 찾는 길은 내 손으로 완전한 로켓을 만드는 것뿐이라고 다짐했지요.』

상급반이 되자 겉치레로 입시공부는 했으나 우주선에 관한 행사가 있으면 빠지지 않았다. 고3때도 서울대 조선항공학과의 어느 교수가 대전에서 강연을 하자 그 곳까지 찾아가 교수의 사인도 받아왔고 그 후도 자주 찾아 다.

그러나 채연석은 그 교수를 강의실에서 만날 수는 없었다. 그는 마땅히 항공공학과로 가야 했으나 그런 학과는 서울대 조선항공공학과뿐이었고 거기에 원서값을 날리지 않은 것은 더 마땅한 일이었다.

그러나 71년 경희대 물리학과에 들어간 채연석은 스스로 「로켓학과」를 차리다시피 했다. 입학하자 학과장을 통해 로켓연구비를 신청했고 학교측도 돈을 주지는 않았으나 실험실은 마련해 주었다. 「학생과학」기자시절의 경험을 살려 교지에 글도 썼다.

『1학년 첫학기가 끝나기도 전에 이름이 「로케트」로 바뀌었습니다. 어느 교수님은 출석을 부르실 때 「로케트」라고 하셨어요. 저를 찾아오는 타대학 친구들도 이름보다 「로케트」나 「로케트에 미친 ⅹ」을 대는 것이 편했어요.』

그 별명은 곧 학교울타리를 뚫고 나오게 된다. 채연석은 중학시절부터 연고가 있던 「학생과학」본사에 중고생을 대상으로 하는 「한국우주로켓클럽」본부를 두고 강의도 했다.

잡지사는 그에게 「로켓이야기」도 쓰게 했다. 그 글은 원래 3회로 예정 됐으나 독자들의 반응이 좋자 1년반이나 쓰게 돼 책 한권 분량이 됐다.

그는 「로켓과 우주여행」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냈고 문공부는 72년도 우량도서로 선정했다. 어엿한 지식인들도 저술가가 되기 힘든 시절에 학생으로 우량도서 저술가가 되자 학교측은 졸업할 때까지 총장장학금을 주었다.

『대학원은 로켓연구와 더 가까운 기계공학과로 옮겼습니다. 그곳 교수님들도 저를 격려해 주셨으나 제가 현대적인 이론보다 한국의 역사공부에 매달리는 것을 너무 안타까워 하셨어요.』

채연석은 고교시절부터 로켓의 원조격으로 중국에서 13세기에 나온 火箭(화전)이나 우리나라의 첫 로켓과학자인 고려의 崔茂宣(최무선.13251395)에 관심이 많았고 대학에 가서는 그 방면의 자료를 얻으려 이 대학 저대학 교수들을 찾아다녔다.

『로켓을 만드는 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기에 그 기초를 다져야 한다고 봤지요. 그래서 첨단기술공부는 미국유학이후로 미루고 세종때에 만든 神機箭(신기전)을 연구하며 언젠가 만들겠다는 꿈도 꾸었습니다.』

채연석은 93년 대전엑스포에서 신기전을 발사함으로써 22년의 숙원을 이뤘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방위근무를 마친 뒤 유한공전 전임강사로 있던 그는 처음으로 국가적 사업을 떠맡았다. 78년 11월 박정희대통령이 행주산성을 시찰하면서 『행주산성싸움에서 火車(화차)를 썼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을 복원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신문에서 그 기사를 보자 이것은 내 일이다고 단정했습니다. 얼마후 문공부의 관계자가 초조한 표정으로 저를 찾아 왔어요. 그래서 여기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다고 하자 살았다는 표정이었어요.』

이듬해 10.26사건이 한달만 늦게 터졌더라면 채연석의 생애는 크게 달라졌을지 모른다. 적어도 그의 미국유학을 자비로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화차는 성공적으로 복원 됐으나 주인이 없어 썰렁한 잔치가 돼버렸다.

그러나 채연석은 이 실험의 결과와 이전의 연구를 「한국초기화기연구」로 정리한 뒤 81년 미국 미시시피대 항공우주공학과 대학원에 진학한다.

『83년 헝거리에서 세계항공우주학회가 열렸는데 가지는 못했지만 우리나라의 옛 로켓에 관한 논문을 보냈더니 반응이 너무 좋았어요. 대학에서도 저의 개인적인 역량과 한국에대한 인식이 달라졌습니다.』

그들과는 다르나 기자도 새삼 인식이 달라진 데가 있다. 그가 조선항공공학과로 가는 길을 가로막았던 그 많은 입시과목들에 대한 인식이다.

그 과목들에 들어있는 지식이 진정한 항공공학에 얼마나 구실하며 채연석 대신에 입학한 정통파 항공공학도들 가운데 몇명이 지금 항공공학을 위해 일하고 있을까.

87년 박사학위를 받은 채연석은 잠시 NASA(미항공우주국)에서 일하다 귀국해 항공우주연구소의 전신격인 천문우주과학연구소에 들어가 로켓연구에 뛰어 들었다. 드디어 멍석이 깔린 것이다.

『귀국후 몇몇 대학에서 강단에 서라는 교섭이 왔습니다만 사양했습니다. 저는 강단보다 실험실이 편한데다 대학은 제가 어려서 추구했던 로켓만들기와도 거리가 있어서요.』

93년은 그에게 기념할만한 해였다. 어려서부터 그림과 모형으로만 보았을뿐 실험을 하지 못한 신기전을 엑스포를 계기로 하늘에 올린 것이다.

더 큰 것은 연구소가 개발한 1단형 과학로켓(KSR1)의 발사실험에 성공한 것이다.

95년 국내최초의 액체추진로켓엔진의 발사실험에 성공한 것도 한국의 우주로켓개발에 뚜렷한 이정표가 될 것이다. 「눈으로 보는 로켓이야기」와 「눈으로 보는 우주개발이야기」라는 두 권의 책도 내놨다. 학생저자로 내논 「로켓과 우주개발」을 23년만에 박사저자로써 크게 보완한 것이다.

98년에 발사한 2단형 과학로켓은 발사실험과 자료수신까지 성공하여 2005년에 무게 1백㎏급의 과학위성을 띄울 발판이 마련 되었다.

「로켓 장난」에 미쳤던 시절 돈이 아까운 줄 모르고 코묻은 돈을 쏟아 부었던 채연석에게 요즘은 로켓이 돈으로 보인다. 로켓은 선진국 흉내를 내려는 허영이 아니라 산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현재 연간 1백기이상 발사 되는 위성의 발사서비스시장에서 10만 점유해도 1천억원의 매출을 올린다는 계산이다. 그것은 어렵지만 꿈을 키우면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저는 도저히 길을 찾을 수 없을 때 꿈을 꾸는 버릇이 있어요. 옛날의 이동식 로켓발사대인 火車(화차)를 복원할 때 3백개나 되는 부품을 다 갖춰도 만들어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이것을 직접 개발하신 文宗(문종.14141452)의 능에 가서 빌었더니 그 날밤 꿈에 설계도가 보였습니다. 그 뒤로는 길이 막혀버린듯한 연구도 꿈에 보이면 해결됐습니다.』

그의 꿈에는 3만리의 골인지점이 보인다. 우연인지 구멍이 뚫렸던 고막도 30년의 재생기간이 지나면서 회복되어 가고 있다.

양 평 문화전문기자 (세계일보)


19990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