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곬인생] 강정식 회화연구소장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들 한다. 그러나 길다고만 했지 영원하 다고는 하지 않는다.

예술은 사람보다 오래 살 뿐 언젠가는 죽는다. 문학이나 음악같이 형태가 없는 예술도 대부분은 세월의 풍화작용에 부대끼다 사라진다.

하물며 몸통을 갖고 태어난 미술품이 生老病死(생로병사)한다는 것 은 말할 것도 없다. 생로병사는 그래도 천수를 다한 셈이고 반달족 들에게 목이 잘린 그리스조각들을 보면 미술품은 전사하거나 단두형으 로 비명횡사도 한다.

따라서 미술품을 치료하고 돌봐주는 의학과 의사가 없을 수 없다. 「강정식 회화보존修復(수복)연구소」라는 낯선 연구소는 「강 서양 화과 의원」으로, 그 대표 姜貞植(강정식.61)은 「강 원장」으로 읽는 것이 편하다.

그는 서양화의 역사가 짧고 그것을 보존하는 역사는 없었던 우리나 라의 병든 서양화 명작들을 70년대초부터 치료해 왔다. 지난해 연 말 그는 국립현대미술관 보존과학담당관으로 정년퇴직했는데 그 자리도 현대미술관 부속병원장 같은 것이다.

강정식은 겉보기에도 의사다. 의사는 청진기를 대기전에 그 모습으 로 환자를 안심시켜야 한다는 말대로라면 듬직하면서도 부드러운 인상 의 그가 눈이 없는 환자만을 다루는 것이 아깝다.

『미술품을 보살피다 보니 그것이 너무나 사람과 흡사해서 놀랐습니 다. 끊임없는 사랑으로 보살펴야 하며 망가진 뒤에 손질하는 것보다 미리 좋은 환경에서 보존하여 손상을 막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요』

자리를 잡기가 무섭게 꺼낸 이야기도 의사들에게서 자주 듣던 예방 의학이자 환경의학이다.

1938년 충남 서산태생인 강정식은 생애 자체가 하나의 유화같다 . 어렸을 때의 모습인 밑그림위에 불투명 기름물감으로 덧칠해 딴 모습이 된 것이다.

그의 초상화에서 30년분의 덧칠을 벗겨보면 30세 전후의 양계장 주인이 모습을 드러낸다. 대체로 삶의 포석이 끝나는 나이에 그는 닭똥을 치우기에 바빴고 거기서 또 10년의 덧칠을 벗기면 그는 홍 성의 廣川상고학생으로 그림과도, 닭과도 인연이 먼 모습이다. 그는 군에서 제대하자 이것저것 해보다 부평서 양계장을 차렸다. 그 무 렵의 강정식에게서 억지로 오늘의 모습을 찾자면 손재주가 뛰어났고 남달리 성실하며 꼼꼼하다는 정도다.

『그 때 부평의 이웃에는 尹胄榮(윤주영)문공부장관의 선친이 농장 을 하고 계셨어요. 노인 내외가 적적하게 사셔서 제가 틈틈이 찾아 가 말벗도 돼 주고 농장의 이런저런 살림살이를 챙기고 정리하는 일 을 도와 드렸습니다』 그것이 인연이 돼서 현대미술관직원으로 특채됐 으나 이웃을 잘 둔 덕인지, 성실한 덕인지는 가리기 어렵다.

국립현대미술관은 69년 경복궁안에서 창설되어 71년부터 본격적으 로 작품을 수집하는 한편 기구도 키워가고 있었다. 그래서 강정식은 72년 가장 한직인 미술관의 맨 아래 공무원이 됐으나 그나마 「 정실인사」였다.

그의 공무원생활은 창고지기로 시작했다. 직함은 전시계의 직원이었 으나 아무런 미술지식도 없는 그가 할 일이란 소장미술품을 관리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현대미술관은 72년 「한국근대미술대전」을 통해 한국현대미술이 태 동한 10년대부터 60년대까지의 작품을 수집하는 등 4∼5년간 4 백∼5백점의 작품을 확보했는데 대부분 서양화였다.

미술품들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한세대전 우리나라의 열악한 주 택사정도 있어 온갖 병에 걸려 있었다. 이 작품들을 「한국미술사의 유산」이라고 떠받든 것은 나중의 일이고 많은 작품이 비좁은 집에 서 눈치꾸러기로 지내는 동안 타박상은기본이고刺傷(자상)으로찢어진것 도수두룩했다.

온습도 조절이 안된 상태여서 대부분이 갖가지 피부병을 앓았는데 심한 것은 무좀(곰팡이)으로 아예 화면의 일부가 없어지거나 너덜너 덜했다.

『작품들이 병들어 있어도 치료는 엄두도 못내고 망가진 액자를 갈 아주는 등 간병만 열심히 했지요. 그러다 보니 미술품에 대한 애착 이 생겨 이를 수복하고 싶어지데요』

그는 미술품수복에 관한 공부를 시작했다. 상고졸업의 지식마저 닭 장에서 까먹어 버린 그였지만 열심히 찾다 보니 일본문화원을 통해 수복에 관한 자료도 얻을 수 있었다. 일본에 수복전문기관이나 전문 가를 양성하는 교과과정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연수를 꿈꾸기도 했다.

그런 저런 일로 강정식은 밤늦게까지 남아 일하다 관장에게 소주를 가장 자주 얻어 마시는 직원이 됐다. 소주보다 더 큰 소득은 주 위사람들이 미술품보존을 위한 그의 열성을 인정하여 일본연수를 하도 록 도와준 점이다.

역대의 관장들이 모두 그의 도일연수를 추진했다. 그러나 여기엔 국가예산이 반영돼야 하고 그러다 보니 기획원까지 움직여야 했다.

미술품수복이라는 말이나마 이해해 주는 것도 미술관안의 사정일 뿐 덕수궁돌담길만 벗어나면 씨도 먹히지 않았다. 김포공항을 벗어나는 것이 사치로 비치던 70년대에 미술품손질을 배우러 외국에 나간다 니 무슨 한가한 나들이냐는 식이었다.

강정식은 별수없이 심하게 손상된 그림들을 들고 문공부와 기획원의 담당자들을 만나 설명했다. 약값을 달래다 못해 아예 환자를 떼메 고 다니며 보여주자 호응이 있었다.

10.26이 일어난 79년은 강정식에게도 특별한 해였다. 이해 1월 그는 모범공무원으로 국무총리상을 받았고 12월에는 일본의 도 쿄예술대 보존과학실에서의 6개월 코스 연수를 떠남으로써 수년래의 숙원을 푼 것이다.

그는 도쿄예대서 이론교육을 받는 한편 사설인 고야노(小谷野)회화 보존연구소에서 실무를 익혔다.

강정식은 그 때 高羲東(고희동.1886∼1965)의 「자화상」( 1915년작)및 具本雄(구본웅.1906∼1965)의 「나부상」(2 9년작)과 「여인」(40년작) 등 3점의 그림을 수복하러 가지고 갔다.

한국의 첫 서양화가인 고희동은 바로 도쿄예대의 전신인 도쿄미술학 교에서 서양화를 익혔고 그의 「자화상」은 졸업작품같은 것이었다. 한국의 첫 서양화가가 일본서 공부한 것은 그렇다 치고 광복후 35 년이 지난 이제 그의 첫 작품이 치료를 받으러 모교를 찾아간 것은 여러가지를 생각케 하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강정식의 가방끈이 짧은 것은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 에게는 역사니 민족이니 하는 것은 관심밖이었고 작품들을 고쳐서 오 는 일만도 벅찼다. 일본미술계의 미술보존실태를 머리에 담기에도 바 빴다.

『그곳서 본 미술품수복은 통념으로 알던 것과는 너무 차이가 있었 지요. 수복은 기술이나 예술이기에 앞서 의사의 윤리같은 하나의 철 학이지요. 미술품을 당장 그럴듯하게 꾸며내 놓는 것이 문제가 아니 라 하나의 생명체로서 보존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미술품수복에서 가장 비중을 두는 것은 원래의 모양이 훼손되지 않 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유화에서 물감이 벗겨졌을 때 같은 색의 유화물감을 써서는 안되며 원래의 그림보다 더 「걸작」으로 개작하다 시피 하는 것은 아예 악덕화상들이나 할 일이다.

수복에서는 언제나 쉽게 지워낼 수 있는 물감을 써서 나중에 더 좋은 기술이 개발될 경우 원형을 되찾을 수 있는 可逆的(가역적) 기법을 철칙으로 삼는다.

그는 일본의 미술관들을 둘러보고 온습도가 자동조절되는 시설에 놀 랐으며 그 경험은 몇년 뒤 과천국립현대미술관의 건설에 반영됐다.

강정식은 이듬해 5월 수복작업을 마친 구본영의 작품 2점을 가지 고 귀국했다. 고희동의 「자화상」은 워낙 상태가 나빠 몇달 뒤에야 돌아왔다. 미술품이 그처럼 장기입원해야 한다는 것도 그가 새로 얻은 지식이었다.

작품은 두점만 돌아왔으나 그 반향은 컸다. 5.17직후의 어수선 한 상황에서도 신문들은 이를 큰 지면으로 반겼다. 지식층은 「9. 28收復(수복)」과 다른 「修復」이라는 말이 있다는데 속으로 놀랐 으나 미술품의 입장에서 보면 두 「수복」은 비슷하다.

덕택에 해외연수도 쉬워져 그는 82년, 86년, 90년의 세차례 나 더 도일연수기회를 가졌다.

『일본서 처음 6개월 받은 연수는 의사로 치면 예과과정이나 마친 정도여서 주사도 놓을수 없는 수준이지요. 그래도 작품의 클리닝을 자신있게 해서 다행이었습니다』

82년의 2차연수를 마치고도 그는 작품에 손을 댈 수 없어 고야 노연구소의 전문가들을 데려다 우선 급한 작품들을 수복했다.

그래도 그가 현대미술관의 설계단계에 참가해 미술품창고를 지하실에 두지 않도록 처음부터 막은 것은 다행이었다. 준공당시 창고는 시 멘트벽이었으나 습도의 급변을 막도록 안벽에 나무를 입혀야 한다는 이 「사계의 권위자」의 주장에 따라 그 공사를 해야 했다.

강정식은 손상이 가벼운 작품부터 손질하다가 연수횟수가 늘어남에 따라 점 차 어려운 작품으로 손길을 옮겨 갔다. 그가 지난해 퇴직하기까지 손질한 작품은 약 2백점.

기술이 완숙단계에 이르자 퇴직하게 됐지만 아쉽지는 않았다. 현대 미술관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미술품들이 다 크고 작은 병에 시달리 고 있어 지금도 그는 바쁘다.

『몇년전부터는 대학강의도 나가고 있어요. 조선대와 중앙대에 이어 새 학기에는 추계예술대에도 나가게 됐는데 바빠도 너무 보람이 있 습니다』

흔히 듣는 「보람」이라는 말이나 새삼 그가 쓰고보니 뜻이 엇갈린 다. 가르치는 보람일까, 자신의 초상화에 또 한번 덧칠하는 보람일 까. 상고생,양계업자,미술품 의사에서 대학 선생님으로…

/양 평 세계일보 문화전문기자
1999.0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