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성 영화촬영감독

영화 「서편제」가 히트하자 이 영화의 스타를 두고 논쟁을 벌인 사람들이 있었다. 물론 영화이야기밖에는 별로 할일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한 쪽은 정석대로 「서편제」의 스타가 남녀주인공이라고 했고 다른 한 쪽은 이 영화로 신데렐라가 된 여주인공 오정해와 촬영을 맡은 鄭一成(정일성 70)이라고 했다. 정답이 있을리 없는 이 말싸움은 그때그때 목소리 큰 쪽이 이겼다.

논쟁은 싱거웠으나 스크린에 얼굴이 비치지 않는 촬영감독이 스타덤에 오른 것만으로도 우리 영화계는 한 발짝 나아간 셈이다.

촬영감독이란 영화가 끝나 관객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선 뒤에 나오는 종영자막의 구색맞춤이 아니라 영화의 성패를 가르는 한 핵심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 것이다.

지난 5월부터 남원에서 「서편제」의 후속편격인 판소리영화 「춘향뎐」 촬영에 바쁜 정일성을 만나본다.

청바지 차림에 서둘듯 빠른 걸음걸이의 그는 70대 할아버지 같지는 않고 더욱이 몸에 배변보조기를 차고 살아가는 사람같지는 않다.

『건강해 보인다구요? 그것이 사실이라면 건강 자체에 신경쓰지 않고 오직 영화 일에만 전념한 것이 그 비결일 겁니다』

일에 전념하니 건강해지더라는 말이 흔하다고 정일성까지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그가 몸 속에 기계를 박고 살아야 하는 것이 바로 영화일 때문이 아닌가.

정일성은 1929년 일본 도쿄에서 건축설계사 정재호(93년 작고)의 4대 독자로 태어난다. 생활이 넉넉해 재일동포들이 겪는 고통을 모른채 마쓰무라 가즈나리 (松村一成)라는 장난꾸러기 일본아이로 스스럼없이 자란다. 영화에 남다른 관심도 없었다.

도쿄 제2공업학교에 진학할 때도,그 후 귀국해 서울공대 기계과에 들어갈 때도 그에게 영화는 구경거리였을 뿐 일거리는 아니었다.

대학시절 그가 도강한 것도 정치학과 이용희교수의 강의였지 영화나 연극이론 같은 것은 아니었다.

6.25 이듬해 대학을 졸업한 그는 미국에 가려고 미국공보원에 취직하나 그가 생각한 미국은 할리우드가 아니라 기계공학 기술을 팔아먹을 곳이었다.『54년 대구출장길에 공군장교로 있던 정인엽 선배를 만났더니 공군영화 「출격명령」의 촬영을 거들어 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아르바이트 삼아 손을 대보자 거기엔 렌즈라는 기계적 논리와 예술의 논리가 있어 공학도인 제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공보원의 편한 일터를 버리고 찾아온 영화계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필름이라야 미군부대서 흘러나온 항공정찰용 필름이었다. 현상약품을 아끼느라 촬영이 끝나면 한꺼번에 현상하게 돼 제대로 찍혔는지 모른 채 몇 달 동안 마음을 졸여야 했다.

그를 부리던 촬영기사는 최은희의 첫 남편이자 권투선수였던 김학성이었는데 언젠가는 여배우 이민자에게 반해 한눈을 팔다 본때 있는 주먹맛을 보기도 했다.

그런 서러움을 견디고 처음으로 촬영을 떠맡은 영화는 「가거라 슬픔이여」 (조긍하 감독). 영화는 기마경찰이 나서야 할 만큼 성황이었으니 마음먹기따라서는 슬픔도, 말썽도, 그리고 신체적 고통도 멀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정일성은 어느 사이엔지 「기사」가 아니라 완벽한 화면을 찾아 구도자의 길에 나선 「예술인」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의 구도는 신체의 일부를 내줘야 하는 생과 사의 갈림길까지 그를 내몰았다 .

『77년 변장호감독과 제작한 「을화」는 「윤화」로 이어졌어요. 촬영장소를 탐색하러 설악산에 가다 차가 벼랑에서 굴러 도로에서 2백여 미터 아래 골짜기에 박혀 버렸습니다. 그래도 큰 부상은 입지 않은 듯했어요』

그래서 정일성은 속초 바다에서 4시간이나 물속에 서서 촬영을 강행했다.그 바람에 교통사고로 상한 내장이 썩어 대장과 소장을 15 ㎝,위를 3분의1이나 잘라냈다.

그 때라도 정신을 차렸어야 했다.하긴 나름대로 조심을 한 셈이다. 한달이나 카메라를 만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한계였다.

손이 근질근질하던 참에 김수용 감독이 「사랑의 조건」을 찍어달라고 했고 다시 만진 카메라는 뗄 수가 없었다. 80년 유현목 감독과 「사람의 아들」을 찍던 중 직장암이라는 선고를 받았다.

『수술실로 들어가려니 다시는 영화를 찍을수 없을 것 같아서 불안했어요. 그런 한편에서는 지금까지 병원장면을 찍을 때 이런 심리를 전혀 살리지 못했다는 회한도 스쳤습니다』

그런 회한은 사치스러운 것이었다. 직장을 떼어낸 정일성은 75㎏에서 42㎏의 딴사람이 되어 퇴원했다.

그는 영화로 그처럼 폐인이 됐고 영화로 다시 제모습을 찾는다.

『한달쯤 쉬고 있는데 임권택감독이 찾아와 「만다라」를 찍어 달라고 했어요. 작품을 읽어보니 멋진 영상이 눈앞에 아른거려 견딜 수 없었어요. 배에 붕대를 감은채 나섰지요』

스태프들은 『임감독이 송장을 데리고 영화를 만들려 한다』고 수군댔다. 그 무렵엔 「강시」라는 말이 없어 송장이라는 험한 말을 썼는지 모른다. 그 영화가 히트해 그런 수군댐이 사그라들 즈음엔 그의 몸도 옛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정일성은 이처럼 영상을 쫓아 임권택과 친해지고 영상을 쫓아 그를 배신하기도 한다.

『85년 임감독과 「티켓」 제작일정을 짜고 있는데 배창호감독이 「황진이」를 찍어달라고 했어요. 파나비전 카메라라도 렌털해 주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덜컥 승낙부터 해놓고 임감독에게 양해를 구했지요』

파나비전 카메라는 세계최고급 카메라로 촬영감독이라면 누구나 만져보고 싶은 꿈의 기재다. 그러나 임권택과의 의리를 팔아 가며 만진다는 것은 엄두가 나지않을 일이다.

그러나 이런 배신으로 임권택과의 연이 끊어지지는 않았고 그후 더 단단해졌다.

「삼국지연의」의 작가 요시카와 에이지(吉川英治)는 여포가 동탁의 적토마에 매수되는 장면에서 『명장은 명마를 사랑한다』며 여포를 두둔하듯 쓰고 있다. 임권택도 『명장(名匠)은 명기(名器)를 사랑한다』고 체념한 채 『名匠이 名匠을 이해해줘야 한다』고 마음을 추스렸으리라.

정일성은 완벽한 영상을 쫓다 보니 민주투사가 되어 고생을 하기도 했다.

그는 유신시절의 장발단속에 반발하여 「바보들의 행진」에서 장발순경이 장발족을 단속하는 장면을 집어넣었다.그 자신도 나이답지않게 장발로 지내다가 10.26이 나자 머리를 깎았다.

그가 독재에 반발한 데는 공대생으로써 정치학과 강의를 도강할만큼 정치학적인 관심이 큰데다 예술인 특유의 자유분방함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좋은 영상을 만드는데 걸림돌이 되어서였다.

『화면에서 여주인공에게 붉은 옷을 입혀도 안되고 붉은 토마토를 비쳐도 동기가 수상하다는 거예요. 「알래스카의 늑대」라는 영화를 만들려 하자 알래스카는 함경도의 은어라고 안된다고 하고…』

그는 87년 표현의 자유를 촉구하는 성명서에 서명한 바람에 영화사가 계약을 파기하는등 수난을 당하다 6.29를 맞기도 했다.

그런 정일성 자신이 독재자가 되기도 한다. 까닭은 「더 좋은 영상을 쫓아서」.

그는 「촬영기사」만 있던 국내영화계에서 「촬영감독」이라는 위압적인 호칭을 들여온 장본인이기도 하나 촬영장에서는 「진짜감독」보다 무서운 폭군이 된다.

인기스타들도 그의 카메라앞에서는 좋은 화면을 만들기 위한 소도구 신세를 면치 못한다. 「만다라」를 촬영할 때는 불과 몇초간의 눈오는 장면을 찍기위해 눈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안성기 전무송 등 일류 스타들을 며칠이고 붙들어 두었다.

그에게는 일류 배우가 높으냐 일류 촬영감독이 높으냐는 키재기도,배우들이 다른 스케줄을 펑크낼 수도 있다는 사정도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그가 아는 것은 『인공눈은 실감이 안난다』는 초보적 상식이다.

『횡포라구요? 영화는 종합예술이기에 작가도 시나리오작가,감독,그리고 촬영감독 등 세명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의 무리수가 통하는 것은 이런 거친 이론보다도 그의 카메라를 거친 작품들이 보증수표처럼 성공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배우들은 그의 독선에 도리질을 치면서도 그의 카메라앞에 서는 것을 영광으로 여긴다.

흔히 독재를 합리화하는 말로 「교도민주주의」니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말이 있지만 그는 「예술적 민주주의」를 내세워야 할 것이다.

정일성은 좋은 영상을 쫓던 나머지 돈을 제대로 쫓지도 못했다. 작품 선정이 까다로운데다 촬영에 완벽을 기하다보니 절대편수가 많지 않다.

『지금까지 40여년간 약 1백30편쯤 찍었는데 요즘은 연간 2편정도예요.우선 양이 턱없이 적은셈이지요. 하지만 돈에 팔려 사생아같은 영화를 찍었다간 그야말로 신세 망치는거지요.』 이야기를 마친 정일성은 스스로 사진기자의 카메라앞에 서서 포즈를 잡아준다.

수줍은 듯 웃으며 두 세대쯤 아래의 젊은 「촬영감독」의 지시에 따르는 그는 「앵글의 마술사」도 「독재자」도 아닌 마음씨 좋아 보이는 할아버지다.

/ 양평 세계일보 문화전문기자
세계일보 1999.0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