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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곬인생] 문화지도 바꾼 '미술출판 대부' 이기웅 사장 요즘 열화당(悅話堂)의 이기웅(李起雄.59)사장은 출판인같지가 않다. 30년을 미술출판에 미쳐 보내더니 아예 '미술품'을 만들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것도 초대형 미술품을.
그는 10년전부터 출판문화정보 산업단지 사업협동조합 이사장을 맡아 왔으나 요즘은 아예 현장인 파주에서 나날을 보내고 있다. 2002년의 입주를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이다.
"단지이름에 '출판'이 들어 있다고 출판사들이나 모여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런 단지는 80년대에 마포에 세웠어요. 새 단지는 종합적인 문화도시지요."
이기웅은 이것을 '미술적인 도시'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는 4년전 황기원 교수(서울대 환경대학원.환경조경학)의 '책같은 도시 도시같은 책'을 내놨는데 그것은 자신의 생각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는 '책 같은 도시'이되 '미술책 같은 도시'를 구상하고 있으나 그 보다는 거대한 미술품을 만들겠다는 것이 드러난 속셈이다.
1940년 강릉 태생인 이기웅은 미술과 출판의 분위기에서 자랐다. 그는 '悅話堂'을 세운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자랐다.
그의 먼 선조는 강릉에 낙향하자 1815년 선교장(船橋莊)이라는 장원을 세웠고 열화당은 그 사랑채다.
개화기에 들어서자 열화당은 지식인들의 사랑방이 됐다. 이기웅의 조부 이근우(李根宇)는 개화지식인으로 여기에 동진(東進)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학생들은 부근의 청소년들이었으나 선생들은 전국의 지식인들이었다. 몽양 여운형도 그 하나였다.
이기웅은 71년 출판사를 세울 때 이름을 '동진문화사'로 짓고 싶었으나 동명의 출판사가 있어 '열화당'으로 정했다. 그의 명함에는 '열화당'밑에 '1815년'이라는 작은 글씨가 쓰여 있다.
"어렸을 적부터 열화당에서 족보를 찍어내거나 문집을 만드는 광경을 많이 보았지요. 글씨 쓰고 그림 그리는 것을 구경하면서 심부름도 했습니다"
나무 그늘에 서화를 말릴 때는 그늘이 움직이는데 따라 작품들을 옮기면서 한지의 속성을 배웠다.
언제부터라고 할 것도 없이 그의 장래희망은 출판이 돼 있었다. 성균관대 철학과를 졸업한 그는 ROTC장교의 군복을 벋기도 전인 66년 출판사 일지사(一志社)에 입사했다.
"원래는 집안과 절친한 을유문화사로 갈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입사하려니 내 스스로 길을 찾고 싶었어요. 마침 일지사에서 사원모집을 했거든요."
이기웅의 얼굴이 주는 이미지와 다른 이야기다. 보기에 따라 날카롭기도 섬세하기도 하나 어느 편이건 잡초같은 생명력이나 자립심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얼굴이다. '미술출판'과 딱 들어맞는 얼굴이다.
그가 출판산업단지 건설이라는 방대한 사업에 앞장설 때도 출판계 안팎의 많은 사람들은 놀랐다.
이기웅은 96년 열화당 창립 25주년을 맞아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예술을 위하여'라는 사사를 책으로 내 놨다.
여기엔 '열화당 사람들'이라는 페이지에 '일했던 사람들'과 '지금 사람들'로 나누어 열화당을 거쳐간 사원들의 입사와 퇴사 일자가 기록 돼 있다. 사장의 꼼꼼함과 따뜻함이 양립하는 페이지였다. 그에겐 꼼꼼함과 담대한 추진력도 양립하고 있다.
일지사의 김성재(金聖哉)사장은 그를 신임해 이삼년이 지나자 편집장에다 업무부장으로 살림을 도맡게 했다.
김성재는 또 이기웅에게 출판사를 차리도록 권하며 도와 줬다. 그래서 71년 수유리의 집에다 열화당을 차리고 사장 노릇을 하면서 4년간 일지사 사원으로 봉급을 받았다.
75년 살림을 차려 나갈 때도 김성재의 도움이 컸다. '캘리포니아 90006'을 출판하도록 권하면서 비용까지 대 줬는데 이 책이 히트하여 셋방살이나마 분가를 할 수 있었다.
사장 초년의 이기웅은 어린 시절 열화당의 체험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처음 내논 책이 조선조의 천주교박해를 다룬 '벽위편'(闢衛編)영인본이었다.
이기웅이 청진동에 차린 출판사는 10여평의 셋방을 '문학과 지성사'와 나눠 썼으나 방은 넓었다. 식구가 사장 두 명과 여사환 한 명이었다.
다음해 사무실은 세 배로 늘어났으나 '문장사'와 '과학과 인간사'가 들어와 실내는 미술과는 거리가 먼 도떼기시장이었다.
이런 속에서 75년 그가 내논 '미술문고'는 열화당의 기반이 됐고 한국출판사의 기념비였다.
"미술출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일지사 시절인 69년 일본 출장을 가서부터였어요. 우리를 안내한 이와나미(岩波)출판사 직원이 통계를 들이대며 한국은 미술이 널려 있는 나라인데 왜 미술출판이 없느냐는 거예요."
그러나 미술출판은 당시의 시장 여건으로는 모험이었다. 이기웅은 '미켈란젤로' '고흐' '고갱' '피카소' 등을 문고라는 가벼운 책으로 보여 줬다. 이 책들이 컬러로 나오자 그 반응은 너무 좋았다. 현대화랑에서만 일주일에 백권 넘어 나갔다.
이기웅은 안목도 있었으나 시운도 따랐다. 70년대 중반은 우리나라의 미술이 마악 꽃피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60년대 이후의 주택보급으로 아파트에는 빈 벽면이 많아 그것을 메꿔 주는 장사가 활기를 띠고 있었다. 배고팠던 화가들이 목돈을 만지게 되고 브리타니카백과사전이 주인의 영어실력과 상관없이 벽면을 채웠다.
동기야 어찌됐건 미술시장이 활기를 띠자 미술지식에 대한 수요도 늘어나 이기웅에게는 처녀시장같은 것이 열려 있었다.
다음해 이기웅은 문학책도 냈다. '문학과 지성'과 동거한 부산물이었으나 이 때도 그는 '주머니 속의 꽁트'라는 작은 책으로 탐색했다. 이 책이 히트하자 '주머니 속의 시''주머니 속의 에세이' 등 주머니시리즈를 펴내면서 주머니를 불렸다.
"그 뒤에도 문학도서는 내놨으나 본령인 미술을 벗어나지는 않았습니다. 77년부터는 미술문고보다 차원이 높은 '열화당 미술선서'로 '서양미술사'를 내놨지요. 미술독자들의 수준이 올라간 덕이었습니다."
미술문고를 내논지 3년만에 열화당은 미술출판사도써 확실한 자리를 차지했다. 80년대에 들어서자 마포의 출판단지에 자기집을 마련했고 84년부터는 '열화당 미술연감'을 내놓기 시작했다.
"미술독자들의 안목을 끌어 올리는 것이 열화당의 임무이자 살길이라고 봤지요. 미술연감도 그런 뜻에서 내놨으나 너무 일렀습니다. 90년 중단할 때는 출판인이 아닌 '미술인'으로서 슬펐지요."
그런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이기웅은 순수미술만 맴돌던 출판내용을 사진과 건축등으로 넓혀 나갔다. 83년 '황해도 내림굿'으로 시작하여 93년에 20권으로 완간 된 '한국의 굿'시리즈는 미술출판의 영역을 벗어난 것이다.
'한국의 굿'이 사진작가 김수남과의 만남이라면 또 다른 사진작가 강운구와의 만남으로 87년에 내논 '경주 남산'도 열화당의 큰 자랑이다.
90년대에 들어오자 이기웅은 만화까지도 미술로 아울렀다. '한국만화의 역사''한국만화의 선구자들''한국만화의 모험가들'.
사라져 가는 우리 문화유산을 '한국 호랑이''장승''초가''조선땅 마을지킴이' 등으로 소개한 '한국기층문화의 탐구'시리즈에 이르러 이기웅은 출판인이자 문화사가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가 7백권이 넘는 책을 내는 동안 자신도 책도 무수한 상을 받았으나 그 상들을 일일히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열화당의 책들끼리 부딛쳐 어느 책이 밀려나기도 하고 어느 상을 먼저 타서 다음 상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그래서 바쁘기만 했던 이기웅이나 요즘은 파주의 단지 건설 때문에 두겹으로 바쁘다.
"89년부터 추진해 온 이 사업은 출판계가 아닌 우리 문화계의 숙원사업이기도 합니다. 출판사만이 아니라 인쇄 제책 등 관련산업체들이 들어옴으로써 출판의 메커니즘은 물론 문화의 지도가 바뀌게 되지요."
단지 건설의 전진기지인 인포메이션 센터의 완공 기념식이 열린 것은 99년 9월 9일 9시부터 9시까지. 장난스럽기도 하나 날자에 미술을 도입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이기웅은 이사장으로서보다 48만평의 땅에 그림같은 도시를 '편집'하는 일에 더 바쁘다.
"저기 냇물이 흐르고 있지 않습니까? 저 냇물의 운명에 단지의 운명도 걸려 있습니다. 저것이 아름답고 살아 있는 냇물로 단지를 관류하면 이 단지는 우리의 문화계를 이끄는 문화촌이 되는 것입니다" 이기웅은 연못이 있는 강릉의 悅話堂을 悅話市로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양 평 세계일보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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