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곬인생] 서지학자- 독도박물관장 이종학


書誌學(서지학)이나 서지학자에 관심 있는 이는 드물다. 그들을 반가 워하는 사람은 더욱 드물고 대부분은 귀찮아 한다.

서지학자의 「몽타주」를 그린다면 입성이 초라하고 깐깐해 보이는 노인이 낡아빠진 가방이나 누런 서류봉투를 들고 다니는 모습이리라.

그 속에서 너덜너덜한 한문투성이의 고문서를 꺼내 들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면 일이 성가시다. 세종 때 누가 이랬고 정조 때 뭣이 저랬고 끝이 없으니 세계화시대 에 당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서지학은 초라할 수도, 지난날의 이야기 만일 수도 없다. 거기엔 오늘의 역사가 숨쉬고 내일의 좌표와 사명이 그려져 있다. 李鍾學(이종학.73)독도박물관장은 이를 몸으로 말해 준 다. 자리가 말해 주듯 그는 일본의 생떼로부터 독도를 지키는 이론적 사령탑이다. 울릉도에 웅장하게 자리잡고 있는 이 박물관도 그가 수십년 간 모아 놓은 소프트웨어들을 보관하기 위한 하드웨어로 볼 수 있다.

최근들어 그를 만나기는 힘들어졌다. 그는 대일민간법률구조회(회장 지 익표변호사)가 「일본의 한국 침략은 불법이고 합방은 무효」라며 7년 전부터 일본정부를 상대로 벌이고 있는 손해배상청구소송 때문에 올들어 여섯차례나 일본을 다녀왔다.

『법률구조회측의 증인으로 신청했으나 일본 법원이 거부해 자료만 제출했습니다. 일본의 강제합병을 입증하는 「조선총독보고 한국병합시말」 「추밀원회의 필기」 「한국병합에 관한 서류 」 등 9건이었지요』

「조선총독보고 한국병합시말」은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이 내각에 보고한 극비문서로 한국 병합은 천황이 내 각을 지휘하여 치밀한 계획에 따라 추진했음을 입증하고 있다.

「추밀원회의 필기」는 병합이 절차상의 하자로 천황의 재가를 거치지 않아 일본의 국내법마저 어긴 불법조약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고, 「한국병합 에 관한 서류」는 당시 일본정부와 통감부간에 오간 수백통의 전문이 실 려 있다. 이 전문에는 일본이 조약을 체결하면서 우리 황제의 칭호를 「太公(태공)」으로 떨어뜨렸다가 「李王(이왕)」으로 한자리 올려주는 등 교활한 속셈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 자료들은 모두 일본 국립공문서관 등을 뒤져 수집한 것이라 일본측이 뭐라고 변명할 근거가 없 어요. 8월에는 이것들을 우리말로 번역해 출간할 계획입니다』

이번의 소송자료만이 아니라 李鍾學이 독도박물관에 보존하고 있는 자료들도 대 부분 일본에서 나온 것들이다. 그러고 보면 그는 광복후 일본을 상대로 가장 치열하게 싸우는 한국인이자 일본의 고서점과 문서자료실을 가장 사랑하는 한국인이기도 하다.

그가 일본의 대학도서관이나 정부 자료실에 나타나면 직원들이 알아보고 『「다케시마(竹島:독도의 일본식 표기) 」가 왔다』고 수군대기도 한다.

그러나 李鍾學이 처음부터 일본의 고문서를 모았던 것은 아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그는 「이순신 전문가 」나 「충무공에 미친 서지학자」로 알려졌다.

『어렸을 때는 물론 고문서를 수집할 때도 제가 이런 길을 걸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실은 고문헌이 아니라 그저 책을 좋아 했을 뿐이었어요』

경기도 화성 태생인 李鍾學이 연세대 앞에 연세서림을 열고 일반서적과 함께 고서를 취급하면서부터 그의 생애는 운명에 끌리듯 오늘에 이르렀다.

그가 교육자였던 吉谷(길곡) 徐仁達(서인달 1902∼1990)을 만난 것도 운명의 손짓 같은 것으로 張良(장량)이 黃石公(황석공)에게서 「三略 (삼략)」을 얻은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어느날 한 노신사가 오셔서 고서를 내놓기에 부르는 대로 값을 쳐 드린 뒤 찻집에 모시고 가 차를 대접했어요. 그러자 장사꾼이 무조건 값부터 깎으려 들지도 않고 차까지 대접하느냐며 감격하는 표정이었습니다』

노인은 자기집이 장위동 어디고 장서가 많은데 다 줄 테니 찾아오라고 했다. 도깨비방망이 같은 소리라 믿어지는 않았으나 그 표정이 너무 진지해 며칠뒤 그 집을 찾아간 李鍾學은 기절할 지경이었다.

2층 서재에 값진 고문헌이 빼곡이 차 있었으니 전설에나 나오는 보물창고였다. 그것을 주겠다는 노인 의 설명도 전설 같았다. 그는 68세였는데 관상쟁이가 『내년이면 돌아 가신다』고 해서 신변정리를 하노라는 것이었다.

李鍾學은 「형식적」인 돈을 주고 고서들을 용달차로 실어왔다. 노인이 변덕이라도 날까봐 되 도록 얼씬하지 않을 일이나 李鍾學은 며칠뒤 다시 찾아가 사례한 다음 「용돈」을 쥐어주고 돌아왔다.

『집을 나와 몇걸음 걷자 선생님이 저를 부르시더니 신문지에 싼 고문서를 주시는 거예요. 집에 와서 보니 충무공 친필의 「閑山島歌(한산도가)」가 들어 있어 너무 놀랐습니다. 날이 새자마자 전화를 걸어 이러이러한 것이 들어 있는데 알고 계시냐고 했더니 「그게 있었을 거야」라고만 하시는 거예요』

서인달은 그 후 10년이나 살았으니 관상은 틀린 셈이나 「한산도가」를 두고 보면 맞힌 셈이었다. 李鍾學은 이것을 목숨처럼 보존하다 지난해 다른 자료 8 백점과 함께 현충사에 기증했다.

그는 이것을 지키기만 하지 않고 「한산섬 달밝은 밤에…」로 유명한 이 시가 원래 한시였으며 쓰여진 해가 1595년이 아니라 정유재란으로 한산도를 뺏긴 뒤인 1597년 보성 에서 지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한산도가」를 검토해 보니 지금껏 알고 있었던 것과 달랐어요. 그래서 30년간 「난중일기」 등 다른 문헌을 대조해 보고서 결론을 내렸습니다』 따라서 李鍾學이 「한산도가」 를 얻은 것은 횡재라기 보다 어려운 과제를 떠맡은 것이자 삶의 길을 크게 뒤바꾼 것이다. 이 자료를 살피다 보니 그는 어느새 충무공 전문 가가 되어 한산도가만이 아니라 「난중일기」번역본이 오역투성이라는 사실 , 충무공이 수전만이 아니라 육전에도 능했다는 사실 등 수없이 새로운 사실을 밝혀냈다.

그가 일본의 고서점가를 기웃거리게 된 것도 충무공 때문이었다.

『임진왜란 관련자료들을 보니 충무공이 통영에서 왜장 의 항복을 받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숙종 때 受降樓(수항루)를 세웠다 는 기록이 나왔어요. 그러나 충무에서는 집도 관련자료도 찾을 수 없어 일본에 갔습니다』

李鍾學은 83년 일본 해군자료실에서 수항루가 한 일합방 무렵 일본군함의 포격으로 없어졌다는 자료와 파괴되기 전의 사진 을 구했다. 정부는 그의 자료에 따라 87년 수항루의 복원공사에 들어 가 이듬해 8월 준공했다.

막상 李鍾學은 수항루의 복원준공식에 초대도 받지 못했으나 그 과정은 그의 인생의 한 전기가 되었다. 서지학이 때묻고 한산한 일이 아니라 국가적 사업이 될 수 있음을 실감했고 충 무공에게 집중되었던 그의 관심 폭이 넓어졌다.

『수항루가 임진왜란으로 태어나 한일합방으로 죽었듯 역사는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충무공 의 뜻을 큰 차원에서 되살리려면 우리 역사 전반을 규명해야 한다는 생 각이 들었고 그런 자료를 찾다 보니 일본나들이가 늘어났지요』

일본의 고문서들을 파헤치자 당연히 침략의 물증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는 일 본 스스로 독도가 우리 땅임을 말해주는 「일본해군성 水路誌(수로지)」 등은 물론 1794년 일본의 지도전문가 가쓰라가와 호슈(桂川甫周)가 동해를 「朝鮮海(조선해)」로 그려논 아세아전도까지 입수했다.

이것들을 포함한 3백51종(5백12점)의 자료가 독도박물관의 내용을 이루 고 있으며, 그밖에 3천3백여점의 자료는 독립기념관에 기증했다.

李鍾學은 최근 고향에 부쩍 관심을 보이고 있다. 수원의 집 근처에 자신 의 호를 딴 史芸(사운)연구소를 열고 그동안 정신 없이 모아온 자료를 정리하는 한편 「수원성」으로 왜곡된 「華城(화성)」의 제 이름찾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나이가 들어 고향일에 관심이 커졌다구요? 그 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것을 충무공이나 독도 관계 일과 다른 것으로 봐서는 안됩니다. 화성을 수원성이라고 왜곡시킨 것도 일본이거든요. 관 련자료를 찾기가 힘든 것도 마찬가지구요』

그는 「화성 제이름 찾기」의 가장 어려웠던 부분이 자료찾기보다 우리의 무관심이었다는 말은 감춘다.

李鍾學은 1996년 「수원성 축성 200주년의 해」라는 명칭으로 각종 행사가 열리려 하자 그해 1월 문화재관리국에 청원서를 제출하여 「화성」으로 바로잡았고 12월에는 그 내용이 관보에도 공시됐다.

그러나 98년의 검인정교과서에는 여전히 「수원성」으로 나오는 등 중구난방이었다. 정보통신부의 「수원성 축성 200주년 기념우표」도 계속 판매되어 李鍾學은 법원에 판매중지 가처분신청을 냈으나 패소했다. 잘 못 표기된 우표가 「특정인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사회 전반의 이런 무관심에는 아랑곳없이 李鍾學은 「화성」에 땀만이 아니라 돈까지 쏟고 있다. 그는 정조시대의 축성공사 보고서인 「華城 城域儀軌(화성성역의궤)」의 해제를 영역하여 한지로 2백질을 복간해 이 중 1백질을 외국의 학술기관에 보냈다. 그 반응은 너무 좋았으나 여 기에 쏟은 그의 사재 1억6천만원이 일부라도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나이가 드니 모아논 자료의 뒷마무리가 걱정됩니다. 우리집 2층은 1만여건의 자료로 차 있거든요. 지금까지 어떻게 모을까만 생각했으나 어디에 어떻게 맡기는가도 어려운 문제예요』

「한산도가」는 李鍾學의 손에서 떠났으나 지하에서 그를 붙든 채 부리고 있는 吉谷은 아직도 손길을 거두지 않고 있다.

양 평
세계일보 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