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곬인생] 구히서 연극평론가



「무대주변의 글 쓰는 사람」.

명함에 자신의 신분을 이렇게 쓰는 사람이 있다. 길고 자세해서 더 아리송하다. 그 아래 세 글자도 처음 보는 이들을 헷갈리게 한 다. 「구히서」. 분명 우리말 이름은 아니나 「히」라는 한자를 본 적이 없다.

연극에 조금이라도 관심있는 이들은 그것이 오식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具熙書(구희서.60)를 좀 더 알고있는 이들은 그의 신분을 다르게 쓰기가 어렵다는 것도 안다.

구히서는 25년의 기자생활을 첫날부터 끝날까지 무대주변에서 보냈 고 그 후 5년간은 아예 대학로에서 문화기획가 姜駿赫(강준혁)이 운용하는 메타 스튜디오에 틀어박혀 글을 쓰고 있다. 「히서연극상」 의 주체이자 연극평론가협회장을 두차례나 지낸 그는 연극인의 색채가 짙지만 연극에 앞서 무대 자체를 좋아한다.

『하나의 뿌리에서 줄기나 잎새같은 것이 자라나듯 무대라는 바탕에 서도 여러가지 예술이 생겨나지요. 편의상 이를 연극이니 무용이니 하며 구분하는 것은 어쩔 수 없으나 너무 쪼개려 들면 아파합니다.』

따라서 무대예술을 덩어리째 친하게 지낼 수 있었던 자신은 운이 너무 좋았다는 자랑도 잊지않는다. 그런 자랑을 막을 수는 없으나 그가 철없다고 비웃을 수는 있다.

구히서의 무대사랑은 거저 얻은 것이 아니라 너무 큰 사랑을 포기 해서 얻은듯 해서다. 남자사랑,자식사랑 그리고 이제는 손자사랑...

구히서가 70년 가을 설흔두살의 나이에 일간스포츠의 기자로 특채 된 것도 그렇다. 시험을 거친 여기자라도 결혼을 하면 눈치밥을 먹 던 시절이니 그가 결혼을 했더라면 글을 쓸 기회부터 잡지 못했을 것이다.

『창간초인데다 스포츠신문이어서 문화파트는 미개척상태였습니다. 문 화부는 없고 연예부만 있는 식이었지요. 선배의 남편으로 연예부장이 던 林英(임영.영화평론가)이 어느날 연극담당이 없으니 나와서 연극 리뷰를 쓰라고 했어요.』

구히서는 경기여고를 거쳐 61년 이대 사학과를 졸업한 뒤 10년 간 10여 군데서 일했으나 극장일을 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연극 에 관한 책은 많이 읽었다.

『어려서부터 학예회에서 무용을 하는 등 무대와 친하기도 했습니다. 국민학교 6학년 때는 6.25로 학예회가 열리지않자 제가 주동 이 되어 우리 반을 중심으로 미니학예회도 열었어요.』

그 미니학예회는 무용과 연극및 시낭독 등이 어울린 「종합기획」으 로 오늘날 구히서의 전문분야기도 하다. 어렸을 때 동양극장에서 신 파극을 즐겼던 그는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남편사랑이나 가족사랑을 모른채 극장사랑에 열을 올렸다.

그래서 임영은 『구경만 다니지말고 리뷰를 쓰라』고 간단히 말했으 나 구히서가 무대예술의 배경이라 할수있는 역사지식은 물론 영어실력 이 뛰어남을 알고서 한 말이었다.

그는 기자시절 많은 번역서들을 내놨으며 그 가운데 하나가 슈퍼베 스트셀러 「하바드대학의 공부벌레들」(PAPER CHASE)이다.

『연극리뷰를 쓴다고 들어갔지만 음악도 무용도 담당자가 없어 저절 로 무대예술 전반을 떠맡았습니다. 극장들을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것 을 일로 삼는 팔자가 된 거지요.』

「팔자」라는 대목에서 평소 차갑다못해 화난듯한 이 독신 할머니가 웃는다. 자랑스럽다거나 즐거웠다는 표정만은 아니다. 행간과 웃음 끝에 자조같은 것이 비친다.

25년이나 연극기자로 있다가 한국연극평론가협회장이 된 구히서는 요즘으로 치면 「연극전문기자」나 「무대예술 대기자」라 할 수 있다 . 그러나 그런 말은 구히서가 퇴직할 무렵에야 들리기 시작했고 그 는 「연극기사밖에 쓸줄 모르는 기자」로 시종했다.

기자생활 말년인 92년 동랑연극상을 탔을 때도 그랬다. 연극인은 아니나 연극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해서 준 것으로 기자가 받은 것은 처음이었으나 주변의 반응은 반가움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기자가 왜 연극계의 상을 타느냐』는 정도는 약과고 『구히서는 도 대체 기자냐 연극인이냐』는 소리까지 들렸다.

구히서는 선천적으로 무심한 성품이어서 그런 어려움을 견뎠을 것이 라고 말한다. 그는 학예회를 조직할만큼 적극적인 면도 있지만 대체 로 어느 상황에 적극 뛰어들기보다는 구경꾼이랄까 워처(WATCHE R)의 성격이 짙다는 것이다.

구경꾼이라면 됐지 워처는 또 뭔가. 그러나 그 다음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웬지 구경꾼이라는 쉬운 말로는 감당키가 버거울 것만 같다.

『저는 친한 친구가 죽어도 정열이나 적극성이 없어선지 크게 슬퍼 하지 않아요. 연극구경하듯 너 퇴장할 때가 됐구나 하는 심경이예요 . 아마 결혼도 그래서 못했을 것이고 친구가 이혼을 해도 연극의 한 장면같아 웃고...』

그의 신문사생활도 기자가 아니라 워처로 시작했다. 취재원들을 만 나지 않은채 글만 써서 오랜 동안 「얼굴없는 기자」에다 「구히서」 라는 이상한 이름의 기자로 화제를 낳았다. 사람들과 섞이는 것을 본 능적으로 싫어하는 성품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면 구히서는 여러가지로 非(비)연극적이거나 아예 反(반)무대적이다. 배우는 아니라해도 들릴락말락 낮은 목소리가 그렇고 아무런 정감도 읽을 수 없는 얼굴이 그렇다. 표정만이 아니라 그의 내면에도 전혀 리비도(LIBIDO)가 흐르지 않을듯한 분위기가 더 비연극적이다.

그가 결혼을 않은채 회갑을 넘겼다는 이야기만도 아니다. 독신이나 수녀라 해도 지난날의 이야기가 나도는 수가 있고 심지어는 삭발한 비구니에게서도 『두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운... 』식으로 억눌린 리비도의 신음소리가 들릴 수 있지 않는가. 그 방 면의 이야기가 전혀 들리지 않는 사람이라면 종교적일지언정 예술과는 인연이 없을 것만 같다.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도 헬렌이 외 간남자와 도망친 것으로 시작하여 오디시우스와 페넬로페의 만남으로 끝난다.

『저의 내면은 너무 평범한데도 이상하게 남들이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아요. 기자시절 저는 가슴이 깊이 파인 옷이나 시드루같은 것도 자주 입었지만 그걸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어요. 그것이 원인이었는 지 결과였는지 아무튼 이렇게 살아왔어요.』

그러나 구히서가 그런 비연극적 성격이 아니었으면 연극기자 외길을 걷기는 어려웠을 것만 같다. 그의 오늘은 냉담과 열정,소극성과 적극성이 잘 어울린 결과다. 그는 무대예술의 세계에서는 취재의 차 원을 넘어 적극적인 참가자가 되었다.

무용가 이사도라 던컨의 전기를 번역함으로써 변죽을 울리던 그는 「아일랜드」「시즈 위벤지는 죽었다」「황금연못」 등 수많은 희곡들을 번역함으로써 사실상 연극인이 되었다.

『외국의 연극정보지를 보자 아프리카의 인권문제를 소재로한 「아일 랜드」가 눈에 띄었어요. 우리나라의 정황과 흡사해 친구를 통해 원 작을 입수하여 아프리카와 같은 78년에 공연하여 크게 성공했지요.』

희곡번역으로 끝나지 않았다. 83년부터 85년까지는 국립극단이 공연한 「한국명무전」의 기획 대본 구성을 맡았으며 88년에는 국립 발레단의 장막발레 「왕자호동」의 대본을 쓰기도 했다.

연극이나 무용 등 정통적인 무대예술에만 뛰어든 것도 아니었다. 91년에는 한복디자이너 허영에게 「우리옷의 옛과 지금」이라는 패션 쇼를 열도록 대본을 써주었다.

『가난한 단역배우들에게 돈을 줄겸 모델 대신 1백여명의 배우들을 동원하자 전무송 유인촌 박정자 윤석화 등 정상급배우들이 우정출연 했어요. 행사가 성공한 것보다도 패션쇼가 무대예술이라는 사실을 보 여준 것이 큰 소득이었습니다』

따라서 94년의 정년퇴직도 구히서에게는 한 직업인생의 죽음이라는 쓸쓸한 것이 아니었다. 학예회를 오가나이즈하던 무대로 복귀하는 것이니 유진 오닐이라면 「먼 귀항」(Long Voyage Home) 이라고 했을 것이다. 곧 바로 평론가협회회장에 선출 된 그는 본 격적인 연극대본 「등신불」「황진이」 등을 쓰기 시작했다.

그 다음해가 저물무렵에는 한국연극사의 명물로 기록될 「히서연극상」이 탄생했다.

『이곳(메타 스튜디오)에서는 매달 마지막 금요일밤에 와인파티가 열리지요. 물론 문화계의 마당발 강준혁씨가 주재하는데 문화예술인들 을 포함해 각계인사들이 와요. 연말에는 이들이 각자 가져온 물건들 을 경매해서 그 기금으로 문화사업을 하는데 히서연극상도 그 하나예 요.』

95년 12월 1일. 와인파티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강준혁이 기 습발언을 했다. 와인파티기금으로 연극상을 만들자. 종래의 상은 심 사상의 문제로 말썽이 많으니 「연극계의 어른 한 분」이 모든 것을 책임지는 수상제도를 만들자고 한 것이었다.

참가자들은 얼떨결에 박수를 치더니 『웬지 파티가 수상쩍더라』고 폭소했다.

그런 「욕」을 먹어선지 상은 몸집도 권위도 자라나고 있다.첫해 (96년)는 1명에게 1백50만원을 주었으나 다음해에는 「올해의 연극인」(1백50만원)외에 신인상인 「기대되는 연극인」상(1백만원) 도 생겨났다.

사람 만나기를 무서워하던 사람은 어쩔수없이 「연극계의 어른」이 되고 말았다.

양 평 세계일보 문화전문기자
세계일보 1999.07.19 1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