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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곬인생] 혼이 담긴 연기 60년 무대의 `터줏대감` 백성희 국립극단 연습장앞 소파로 걸어 나오는 그의 모습에서 무용가 마곳 폰테인의 만년모습이 떠오르는 것은 웬일일까. 이날 따라 연극배우 白星姬(백성희.74)의 몸에 찰싹 달라붙는 바지가 우선 무대 위의 폰테인을 연상시켰다고 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평생을 무대에서 보낸 두 무대인의 화장으로 피로해진 살결,그리고 얼굴과 딴판으로 아직도 젊은이같이 가벼운 걸음걸이가 더 그렇다. 『지금 공연중인 「無衣島(무의도)」는 56년전 제가 연극무대에 첫발을 내디딘 「봉선화」의 작품과 연출을 맡았던 함세덕선생의 유작이어서 감회가 더하고…』 겉치레 인사를 흘리기가 바쁘게 작품이야기를 쏟아내는 품이 놀랍다. 그러나 그보다는 56년이라는 말이 새삼 놀랍다. 원로배우라는 것은 알고 있었고 바로 그래서 찾아왔으나 반세기 넘어 지나간 이야기를 어젯일인 듯 말하고 있다. 「선생님」이라는 대목에서는 함세덕의 모습을 찾는 듯 주름살 어린 눈이 일순 초점을 놓은 채 좁혀졌다 펴진다. 눈은 다시 떴지만 그는 99년 여름의 서울보다는 1940년대의 어느 가난한 섬을 보고 있는 기색이다. 요즘 세간의 화제인 「여배우장관」 이야기도 그에겐 남의 이야기다. 「같은 여배우 입장에서」 그럴 수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바로 배우이기 때문에」라는 확신으로 바뀌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그런 의문이 가시자 여자인 그가 「옷로비사건」 같은 데 무심한 까닭도 궁금하지 않았다.그는 지금 아예 옷이 없는 섬(무의도)에 살고 있다. 『「무의도」는 그처럼 상징적인 이름이 아니라 경기만에 있는 실명의 섬으로 함세덕선생의 고향이에요. 가난하고 좁은 섬에서 태어나 바다에서 죽어가야 하는 숙명을 거부하여 육지로 탈출하는 17세 소년의 이야기지요.』 공연작품을 장황하게 설명하려는 그를 말려 연극배우 외길인생으로 말문을 돌렸으나 함세덕까지 피해갈 수는 없었다. 1925년 서울 태생인 백성희는 동덕고등여학교 3학년 때 가출하여 빅타무용연구소에 입단한다. 이듬해 부민관에서 공연되는 함세덕의 「봉선화」를 보러갔더니 배우 한명이 출연하지 못해 막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 무용단에서 그의 연기를 알아준 연극계 인사의 권유로 무대에 선 것이 60년 외길인생의 첫발이었다. 고등여학교 3학년이라면 지금의 중학교 3학년이다. 가출이 심한 오늘날도 놀라운 일인데 1940년대에 어엿한 중산층 부모들의 표정이 어땠을지 가늠하기도 어렵다. 『할아버지는 조선조 때 관리였다는데 무슨 자리였는지는 모르겠어요. 다만 우리는 경복궁 바로 옆인 사간동의 고풍스런 집에 살았고 아버지는 재목상으로 어린 시절은 유복했지요』 한마디로 그는 돌연변이였고 그것은 부모들이 지어준 그의 본명 李於順伊(이어순이)부터 그렇다. 그의 남매들은 모두 「丙」(병)자 돌림의 보통 이름인데도 그만이 세글자 이름이다. 글자수보다도 시골서 문자속 없는 부모들이 마구 부르던 우리말 이름에 억지로 한문을 짜맞춘 듯한 어감이 돌연변이 분위기를 더한다. 그는 가출하면서 「李和子(이화자)」가 됐고 그후 서항석이 지어준 지금의 이름을 받음으로써 돌연변이 이씨의 흔적마저 지운 채 새로 태어난다. 무대에 발을 딛자마자 그는 돌연변이도 풋내기도 아닌 본식구가 된다. 요즘들어 그는 터줏대감으로 불리지만 그가 실제로 터줏대감 노릇을 시작한 시점은 따지기 어렵도록 오래 전이다. 그는 6.25가 나던 1950년 2월 국립극단 창단멤버로 참가한 이후 4백여편의 작품에 출연했다. 80년에는 문화훈장을 받았으며 그 밖에 크고 작은 연극상은 헤아리기도 귀챦다. 『제가 그처럼 빨리 무대생활에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은 가출한 다음해 남편 羅朝和(라조화)씨를 만난 덕이에요. 소설가 나도향의 동생인 그는 저보다 14년 연상이었으나 저를 너무 잘 이해해주었지요. 형을 닮아 문학지망생이었으나 어쩌다 야구를 하게 되자 저더러 자기 몫까지 해달라며 격려했어요』 30년 전 사별한 남편 이야기를 꺼내면서부터 담뱃갑을 더듬더니 말이 끝나기 무섭게 셋째 담배를 빼어 문다. 그러나 한모금 빨고 나서 생긋 웃는 것은 의외다. 『그이가 저더러 담배를 피우라고 권했어요. 결혼한 지 얼마 안되어 맡은 「마인」(김래성작)의 「마리」역이 극중에서 담배를 피우게 되어 고민을 하자 담배 하나 못피우면서 무슨 배우가 되겠다는 거냐고 나무랐어요.요즘요? 하루 열대여섯개비쯤이죠. 물론 마셔요. 소주로 한병반 정도』 70대중반의 이 할머니배우는 지금도 열아홉살 때처럼 무대에 오르고 막이 내리면 소주와 오징어로 뒤풀이하고 있다. 오징어라는 말에 새삼 그의 고른 치아와 유난히 검은 머리가 눈길을 끈다. 검은 머리카락의 뿌리 부분에서도 흰색의 꼬투리를 찾지 못해 헤매는 시선을 백성희가 거두어준다. 『친정어머님이 살아계신데 아직 반백이에요. 제 머리는 새치가 있어 석달쯤에 한번씩 물을 들입니다. 틀니요?』 대답 대신 가볍게 눈을 흘긴다. 배우의 몸은 예술의 필수도구라던가. 그가 타고난 배우임은 원로가 되면서 새삼 확인되고 있는 셈이다. 타고난 몸을 가꾸는 그의 노력도 남다르다. 매일같이 요가를 응용한 물구나무서기와 체조로 몸을 부드럽게 하고 목소리도 가다듬는다. 그러나 백성희가 가장 힘쓰는 부분은 그의 마음에서 세간사를 비우고 연극을 채우는 일이다. 그래서 무대의 주역이고 생활의 단역이라는 말도 듣는다. 마음을 비운다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싱거운 생색 같으나 이야기를 나눌수록 실감이 더한다. 그의 마음에 얼마나 연극을 채웠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얼마나 세간사를 마음에서 비웠는지는 들여다보인다. 백성희는 생애의 중요한 이정표들도 자세히 기억을 못한다. 예를들어 문화훈장을 받은 게 어느 해냐고 묻자 『글쎄 80년대가 아니면 90년대초쯤』이라는 하나마나한 소리다. 그에 관한 신문기사들의 연도가 제각각인 까닭을 알 것 같다. 그래서 부군이 돌아가신 연도가 66년인가 69년인가를 물었을 때는 무대에서 대사를 까먹은 듯 가볍게 당황해하더니 「아마 69년」이라며 기어드는 대사로 넘긴다. 그가 4백여편의 연극에 출연하는 동안 대사를 까먹어 연극을 망쳤다는 소리가 없는 것은 얼핏 기적이고 뜯어 보면 당연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극장 안의 사람들은 주어진 대사만 말한다』고 했다지만 백성희는 대사만 기억하는 것일까. 『대사만 외워서 된다면 얼마나 편하고 따라서 얼마나 따분하겠어요. 배우는 바로 마음에서도 대사의 주인공으로 변신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배우는 한줌의 연기를 위해 우주만큼 생각해야 하며 자신의 정신세계만큼 연기를 할 수 있다는 그의 연기론은 우리 연극계의 금언이 돼 있다. 백성희가 고집스럽게 연극계를 지키는 가장 큰 까닭도 연극이 「배우의 예술」이라는 데 있다.그는 56년 「유전의 애수」(유현목 감독)에,62년에는 신협극단이 제작한 「육체는 슬프다」 등 두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TV의 반공물에 동원된 외에는 영상매체와 인연이 없다. 『촬영 전날 밤을 새워가며 장면 장면의 표정을 구상해 나가지만 막상 화면에서는 제 뒤꼭지만 보이기도 했어요. 그래서 영상물은 감독의 예술이라고 단정했고 「배우의 예술」이라는 외길을 걷기로 했습니다』 백성희의 무대인생은 외길이라기보다 길고긴 열차여행이다. 그 길이는 부산서 서울을 거쳐 신의주에 이르는 정도가 아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에 이른 다음 베를린을 거쳐 리스본까지 이르는 길고긴 여행. 그와 같은 역에서 탔던 김동원 장민호 황정순 최은희 등은 몇 정거장 가더니 영화라는 다른 열차로 갈아탔다. 그보다 한참 늦게 탄 이낙훈 이순재 여운계 등도 얼마 안가서 TV라는 열차로 바꿔탔고 그중 일부는 정치인이라는 딴사람이 되기도 했고 장관도 나왔다. 백성희도 영화와 TV에 출연했으나 국립극단을 떠나지 않은 채였으니 어느 정거장에서의 「외출」이었을 뿐 「가출」은 아니었다. 백성희가 탄 「무대열차」는 지금 어디까지 간 것일까. 그의 호적나이로 보면 그것은 피레네산맥을 넘어가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지팡이를 짚고서라도 무대에 서겠다』는 말로 유명한 백성희에게 플랫폼의 이정표는 무의미하다. 그는 작품속에서 살고 그래서 그의 나이는 늙음과 젊음을 반복하고 있다. 『「무의도기행」에서 저는 함세덕선생이 17세였을 때의 어머니니 50대 시골여자지요. 나이는 문제 아닌데 시골아녀자의 세계가 그리기 힘들더군요』 엄살스런 표정이 사뭇 50대 시골여자다. 50대. 그가 탄 열차는 아직 코카서스산맥 어름을 가고 있다. 양 평 세계일보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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