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문화 문화인] 공연사이트 '인포아트' 박성호 사장


  한 세대전만 해도 공연이 있으면 이를 알리는 굿이 시끄럽게 거리를 흔들었다. 그 소리에 식모들이 꼬깃꼬깃 아껴둔 돈을 꺼내 한동안 망서리나 나팔소리와 꽹가리소리에 흔들린 마음을 가라앉힐 수는 없다. 공연예술은 그처럼 무대가 오르기 전에 시작된다.

  지난날의 신파극이건 요즘의 전통무대예술이건 그것을 알리는 것은 '광고'라는 별도의 일이 아니라 공연의 일부다.그런 공연광고도 이제는 달라져 안방까지 찾아 온다. 기척없이 찾아 오지만 말도 하고 노래도 할 수 있다. 지난해 10월 국내의 모든 공연상황을 인터넷으로 한눈에 보여주는 '인포아트'(www.infoart.com)가 문을 연 것이 그것이다.

  "왜 공연이라고만 하세요? 미술전시도 알리고 경매 등 미술품거래도 하게 될 것입니다. 도서관이나 서점을 가지 않고 원하는 작품을 읽거나 책으로 사게도 될 거구요."

  박성호(朴城浩.32)사장은 이런 순수문화 사업은 물론 여성이나 결혼과 관련된 생활문화정보도 제공하면서 관련사업도 펴겠다는 것이다. 선진국에서는 오래전에 이루어진 일이나 한국에서는 말 그대로 '모험산업'이다.정보산업이 빈약한데다 문화시장도 영세해서다. 막상 박성호는 문화시장을 걱정하지 않는다.

  "문화수요가 빈약한 것은 공급 자체가 약해서지요. 세종문화회관같은 본격적 공연장이 생긴 게 불과 20여년 아닙니까. 앞으로 문화는 공급과 수요가 서로 밀고 끌며 함께 커나갈 거예요."

  '인포아트'를 차리자 회원가입이 폭주해 5개월여 만에 5만명을 넘어 섰다. 자신을 포함해 5명이던 사원은 25명이 됐다. 그 현상도 놀랍지만 박성호가 타고난 문화예술인이 아니기에 더 놀랍다.

  그가 경북 울진서 태어나 봉화에서 자랄 때 오늘의 모습을 찾기는 어렵다. 모범생이라고는 해도 예술에는 재능도 관심도 비친적이 없었다. 억지로 찾자면 고교진학을 마다하고 검정고시의 길을 택한 엉뚱함 정도다. 그가 유능한 정보산업 기술자로 안정된 샐러리맨의 길을 마다하고 문화정보산업이라는 모험의 길을 찾은 것과 희미하게 맥이 닿는다.

  "중학시절 공부에 자신이 붙자 고교에서 3년이나 '썩고'싶지 않았습니다. 졸업하던 해 8월 대입검정고시에도 합격했지요.고교과정을 인격적인 성장과정으로는 보지 않고 대입준비과정으로만 봤던 거지요."

  이듬해 명문 사립대 수학과에 들어 가자 3년의 공백이 아프게 다가왔다. 클라스메이트만 있고 친구는 없는 생활이었다.그 후 검정고시로 진학하려는 후배가 있으면 앞장서 말리고 있으나 자신의 실수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조기입학으로 그는 외토리가 돼 방황하게 했고 그 방황은 또 실연이라는 아픔으로 이어졌다. 그가 91년 독일 에센대 의대에 입학한 것은 괴로운 환경으로부터의 도피였을 뿐이다.

  "의대에 들어간 동기도 국내의 의대지망생과 마찬가지였지요.원래 컴퓨터에 취미가 있었으나 그 때만 해도 밥벌이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습니다."

  의대에서 2년을 지내고 보자 '이것은 아니다'는 생각이 들어 베를린 자유대 정보학과로 옮겨 갔다. 그래서 컴퓨터는 실컷 만지게 됐으나 유럽의 우수한 문화나 예술을 소 닭보듯 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어느날 에센시절 친했던 선배가 전화를 걸어 왔어요. 한국서 귀한 손님이 베를린에 와서 3개월 머물게 됐으니 안내나 통역 등으로 도와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손님은 당시 국립극장 기획담당 장승헌으로 3개월 내내 공연만 보러 다녔다. 박성호도 덩달아 공연을 보게 됐다. 독일에서는 학생들이 반값에 티켓을 살 수 있어 장승헌의 한 장 값으로 둘이 볼 수 있었다.

  3개월간 무용 음악 연극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공연을 50편이나 보았다. 물론 유명한 공연이라는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

  "그 때까지 대학에 음악과가 있다는 것은 알았으나 무용학과가 있다는 것은 모르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래도 관람을 거듭하니 맛이 났어요. 그 뒤론 다른 나라를 여행하면 공연장부터 찾게 됐으니까요."

  장승헌과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베를린에서 박성호의 예술 까막눈을 띄워준 그는 95년 '정보기술자'로 귀국한 박성호를 아예 '예술인'으로 만들었다.그 때는 국립극장을 나와 MCT라는 공연기획사를 운영하던 그가 "책상 하나 줄테니 앉아 있어만 보라"고 권한 것이다.

  그 무렵 박성호는 몇가지 진로를 두고 망서렸으나 예술쪽은 쳐다 보지도 않았다. 베를린 시절 예술에 눈을 떴다고는 해도 예술적 교양을 갖춘 전산기술자였을 뿐이다.

  "장선생님과 함께 일을 하다 보니 진로가 보였어요. 문화예술에 정보기술을 도입하는 일이었지요."

  96년말까지 MCT에서 일하다 자신의 전산기줄을 살려 인터넷 문화정보회사 예스컴을 차렸다. 무일푼인 박성호에게 1억원의 창업자금을 대준 이도 만났다.그들의 기대가 헛되지 않아 예스컴은 성공적이었다.

  97년 창간한 월간잡지 '인포아트'도 무가지였으나 광고만으로도 수지를 맞출 수 있었다. 5명으로 시작한 인원이 40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오너가 아닌 그는 '실장'이었고 자신의 구상을 펼 수도 없었다. 지난해 6월 그는 처음의 동료 몇명을 불러 5명으로 다시 시작했다. 회사이름만 월간지의 이름을 따 '인포아트'로 바꿨다.

  "4년전에 연극 음악 클래식 발레 등 예술장르의 도메인 12개를 미리 확보해둔 것이 큰 도움이 됐지요. 정보통신을 공부한 덕입니다. 선진국 공연계의 패턴을 안 것도 큰 도움이 됐어요."

  예스컴 시절인 97년 그가 세계연극제 티킷의 전산예약 시스템을 개발한 것도 그렇다. 선진국에서 좋은 공연은 언제나 자리가 모자라 미리 예약해야 했던 기억이 나서 해보니 호응이 폭발적이었다. 모든 공연일정을 소비자에게 알려주는 것은 문화홍보의 바탕으로 예스컴시절에 이미 기초를 닦아 놨다.

  이제 '인포아트'사이트를 찾으면 장르별로 날자별로 공연일정이 한눈에 들어 온다. 티켓을 예약하는 고객은 30~50%의 할인혜택까지 받을 수 있다.소비자는 손쉽고 싸게 티켓을 사고 공연하는 측은 관람객의 규모를 예상할 수 있고 그 수가 늘어나는 것이 반갑다.그것은 시작일 뿐이다.

  "지금까지는 공연예술에만 치우쳐 왔어요. 제가 흥미를 가진 것도 그 방면이었구요. 그것만으로는 '아트'라는 이름이 부끄럽습니다. 그래서 지난 15일부터 미술에도 적극 나섰습니다."

  우선은 전시회를 소개하는 데서 시작해 작가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한 눈에 보여 주는 것이다. 그 후 인터넷 미술 경매나 미술품 매매에도 나설 계획이다.

  기존의 공연부문도 할 일이 많다. 인터넷으로 티켓을 사는 것만이 아니라 아예 관람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영화의 경우 워낙 사업이 방대해 그는 '무비스트'를 별도로 차렸다. 케이블TV와 제휴해 원하는 영화를 언제고 볼 수 있는 사이버 상영관을 마련한 것이다.

  음악도 생산된 음악정보만 소개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음악저작권 문제도 있어 신인을 발굴하는 등 음원(音源)확보에 나서기 위해 '유니비트'(unibeat.com)을 별도로 차렸다. 그는 남이 만든 예술정보를 소개하는 단계를 벗어나 정보 자체를 생산하게 된 것이다. 지난해 11월에는 문화관광부로부터 '2000, 새로운 예술의 해' 추진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했다.

  "독일에서의 체험이 너무 감동적이어서 사원들의 해외여행에 지원금을 주기로 약속했지요. 그래서 사원들이 여행계를 뭇고 있습니다. 그들의 기쁨이자 회사의 보탬이 아니겠습니까."

  웃음을 짓는 박성호. 그 모습이 싱거워 보이는 것은 키가 커서만은 아닐 것이다. '정보'라는 말에 움찔하던 시절은 갔어도 아직도 그 말에는 긴장이나 치밀함 같은 것이 숨어 있어 그의 얼굴과 어울리지 않아서다.

  그러나 어쩌랴. 좌절한 수학도로 해외에 도피한 그였으나 운명의 신은 그를 붙들어 예술정보인으로 만들고 있다. 그가 소년처럼 어눌해 보이는 것은 미혼이어서보다 허물벗기가 끝나지 않아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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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평 세계일보 문화전문기자

세계일보 200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