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문화 문화인] 두산세계백과 김홍식 기획팀장


  "컴퓨터로 모든 것이 바뀌고 있지만 백과사전의 상황은 너무 어지럽습니다.'종이 산더미'는 사라져 가고 내용은 무제한에 가깝게 확장되고 있지요." 두산백과의 김홍식(金洪植.41) 백과기획팀장의 말은 진부하다. 요즈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것이 컴퓨터의 용량이 크다는 이야기다.

  시큰둥한 반응을 눈치챘는지 그는 서둘러 컴퓨터를 열고 백과사전 CD롬을 꽂는다. 기존의 '두산 세계대백과사전'을 자신이 팀장이 돼 디지털화한 '엔사이버'(EnCyber)다. 하필 컴맹에 가까운 기자에게 골치아픈 컴퓨터를 열어 보일 건 뭔가. 그러나 못마땅한 건 잠시고 전혀 색다른 세계에 눈길이 끌린다.

  '영국'을 누르자 인종 기후 역사 등 낯익은 항목이 나오더니 '인종'에서 '색슨족'을 찾으면 게르만족이라는 설명과 함께 버튼 하나로 '게르만족'이나 '독일'로 이어진다. 도서관에서 여러 차례 서고를 드나들며 무거운 책과 씨름을 해야 찾아낼 항목들이 버튼 하나에 종과 횡으로 이어진다.

  '역사'항목에서는 스코틀랜드 웨일스 등 영국과 관련된 역사는 물론 세계사 항목이 나란히 있어 단말기가 한번 바뀌는 것으로 충분하다.

  "세계일보를 찾아 볼까요. 이건 서울지돈데 엉성해 보이지요. 그럼 키우지요. 자, 용산인데 세계일보는 좀 아래쪽이네요. 이제 골목도 보이는데 어느 술집을 자주 가십니까."

  김홍식이 움직이는 디지털지도(GIS)의 곁에는 세계일보와 관련된 교단이 있고 그것을 누르면 한걸음에 한국과 세계의 종교로 이어진다.

  김홍식에게 그것은 놀라울 것도 신기할 것도 없는 평범한 산수다. 지난해 9월부터 올 2월까지 집에 간 것은 20일이 못되고 집에서 잠잔 시간이 48시간도 안됐다.

  물론 고생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비전이 있어 확신을 가졌고 그래서 고생을 견딜 수 있었다. 무엇보다 김홍식 자신이 '혁명의 인생'을 살며 얻은 지혜였다. 중학 졸업후 상경하여 포장마차와 노동자생활을 거쳐 서울대 공대를 졸업하는 과정에서 얻은 용기의 소산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전북 순창서 부자였으나 빚보증으로 망해 중학을 졸업하기도 힘들었어요. 서울로 올라와 가리봉동 5거리에서 포장마차를 했습니다."

  지금은 환락가지만 당시는 벌판이던 그 곳에서는 이미 형이 포장마차를 굴리고 있었다. 군에서 제대하여 대학에 복학할 돈을 벌고 있었던 것이다.

  김홍식은 부근 공원들이 끼니삼아 사먹는 고구마튀김을 팔았다. 겨울에 얼어 붙은 고구마에 칼질을 하면 번번이 땅에 굴러 떨어졌고 그래서 힘을 주어 칼질을 하다 보니 자신이 다쳤다며 흉터를 보여 준다.

  "공원들은 내 살점깨나 먹었어요. 그러나 살점까지 팔아도 연탄값을 건지기 힘들어 저도 공원이 됐지요."

  잔업을 도맡아 돈을 모아서 이듬해 용산공고에 입학했다. 버스비를 아끼려 자주 용산서 가리봉동까지 4시간을 걷는 생활이었다. 중동취업이 쉬운 용접 기능사 자격도 땄다.

  그런 가운데도 월간 '학생 중앙'의 학생기자가 된 것은 내림이다. 아버지는 시조를 좋아하던 풍류객이었고 가난도 혈통마저 지울 수는 없었다.

  그러나 1979년 서울 공대의 자원공학과를 택할 때도 바라는 것은 돈뿐이었다. 어려서 금광을 찾고 싶었던 허욕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당시는 오일달러가 세계를 뒤흔드는 한편 포항에서 석유가 나온다는 소문으로 들떠 있을 때였다. 그는 노란 노다지 대신 검은 노다지로 목표를 바꾼 것이다.

  5공정부가 과외를 금지시켜 대학생활도 고생이었다. 교통정리에서 신문사의 교정까지 닥치는대로 돈벌이를 했다.

  그런 가운데도 영화그룹에 가입했고 마침내는 8㎜ 영화 카메라를 사서 영화를 만들었다.

  "대학에 입학하자 곧 '얄라성 영화연구회'에 들어갔습니다. 20분 짜리 작품을 몇 편 만들었는데 박광수 선배(당시 미대)와 함께 만든 '그들도 우리처럼'은 아시아 청소년영화제에서 우수상을 받았지요. 아르바이트 삼아 대학신문에서 일하기도 했구요."

  그 끝에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마친 그는 유공과 동아출판사의 두 곳에 문이 열리자 유공을, 그리고 유전을 포기했다.

  당시 동아출판사는 세계대백과사전의 무리한 출판으로 파산해 두산에 흡수된 상태였으니 그는 두산에 들어간 것이다.

  "출판사에 들어 가자 곧 컴퓨터전문가가 됐어요. 공대출신이어서요? 천만에요. 군대서 정훈병으로 타자기를 만진 덕이지요. 컴퓨터의 자판이 익숙해 컴퓨터를 만지다 보니 전문가가 되고 말았습니다."

  1주일만에 '컴퓨터 전문가'가 되고 말았으나 내용은 '전산 타자수'였다. 하지만 어차피 컴맹들만 있었기에 사내의 여망에 따라 컴퓨터를 본격적으로 배웠다. 컴퓨터 출판시스템을 도입하기 위한 프로젝트에 끼인 것도 필연적인 수순이었다.

  "미국의 HTS(High Technology Solution)사에서 연수를 받자 그런대로 컴퓨터 전문가가 됐습니다. 타자치는 기능 하나가 앞선 것이 결국 큰 전환점이 되고 말았습니다."

  김홍식은 포장마차 출신으로 명문대를 나오게 된 자신의 능력이나 근성은 말하지 않는다. 정훈병 출신의 행운만 강조한다.

  아무튼 그는 93년 오성식의 생활영어를 'SOS'라는 CD롬으로 제작하자고 강력히 건의했다. 당시 CD롬을 사용하는 컴퓨터는 국내에 몇백대뿐이어서 그것은 모험이었다.

  그러나 95년 제품이 출시된 'SOS'는 70만장이 나갔다. 2년의 제작기간에 컴퓨터가 저절로 늘어났고 'SOS'를 쓰기 위해 컴퓨터를 사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이다.

  'SOS'의 성공은 '두산 세계대백과사전'의 컴퓨터화로 이어졌다.

  두산은 이미 96년의 두산 창사 100주년을 앞두고 기존의 동아백과를 보완해 8만 항목(30권)을 13만으로 늘려 45권의 대형 백과사전으로 내놀 예정이었다.

  김홍식은 이것을 16만 항목으로 늘려 CD롬으로 내놓자고 강력히 건의해 관철시킨 것이다.

  "백과사전의 컴퓨터화는 기존의 백과사전 내용이나 사진을 단말기로 내보내는 작업이 아닙니다. 사진의 경우 상태도 좋아야 하는데다 동사진도 써야 하기에 사실상 새로 작업을 해야 합니다. 여기에다 항목들을 종횡으로 이어주는 작업은 컴퓨터가 아닌 인간이 해야 합니다." 그가 반년 가까이 집을 잊고 살아야 했던 이유다.

  45권의 사전으로 수용할 수 있는 16만 항목이 CD 5장에 수록됐고 값은 140만원대에서 11만9000원으로 91.5%가 떨어졌다. 보다 값진 것은 사용자들의 시간이 그 비율로 줄어드는 것이다.

  "엔사이버는 독자들이 편리한 만큼 제작사의 일이 많아지는 사업입니다. 사전의 경우 한번 팔고 나면 독자들과의 연락이 거의 끊어지나 엔사이버는 줄곧 업데이트된 정보를 채워줘야 합니다. 우리 데이터베이스에서는 약 100명의 전문가들이 계속 새 항목을 추가하는 한편 기존 항목을 고쳐 쓰고 있지요."

  김홍식은 이제 백과사전이 무겁고 답답한 책더미들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고 있는 고급정보의 심장기능을 맡게 될 것이나 그 다음의 모습은 알 수도 없다고 말한다. 제3의 물결이 어떻게 흐를지 몰라서다.

  다만 내일은 오늘의 연장이기에 하나의 정확한 콘텐츠를 확보하면 내일도 계속 엔사이버를 주도해 나갈 것이라는 것만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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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평
세계일보 문화전문기자
세계일보 20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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