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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문화 문화인] 서울경매사 경매팀장 박혜경씨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춘희'는 경매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미술품을 파는 격조 있는 경매가 아니라 시끄럽게 살다 간 여인의 유품을 처분하는 경매였다. 주인공이 산 것도 헌책이었다. 소년시절 그 열띤 경매가 재미있었던 만큼 한국에 경매가 없는 것이 아쉬웠다. 경매에 별다른 시설이 필요할 것 같지도 않아서 더 안타까웠다.그런 아쉬움은 '한강변의 기적'이 일어나도 채워지지 않았다. 그러나 경매가 우주선 같은 것과는 다른 '사회적 장치'가 있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그래서 미술경매사 박혜경(朴惠卿.34.서울경매사 경매팀장)을 만나게 되자 용건을 떠나 반가웠다. "한국에서 경매는 겨우 시작입니다. 여러가지 원인이 있으나 지난날 돈을 멀리하던 사대부들의 체질도 그 하나지요. 한 물건을 두고 돈으로 다투는 방식에 익숙해지기까지의 기간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경매'를 하고 있다. 돈을 기피하는 문화 탓에 경매가 늦어졌다며 자연스레 미술계를 변명한다.경매는 60초 승부라던가. 짧은 시간에 핵심을 끌어내면서도 아무에게도 부담을 주지 않는 기질이 몸에 배어 있다. 이전에도 경매는 있었으나 '경매사'는 없었다. 1971년 고미술협회가 주최한 이후 경매는 열렸으나 단발 행사나 중도하차로 끝났다. 경매장도 아닌 데서 경매사 아닌 '사회자'인 협회직원이 '진행'하는 식이었다. 박혜경은 지난해 9월 평창동에 5백50평의 초현대식 건물로 개관한 서울경매장(Seoul Auction House)의 단상에 서는 본격적 경매사다. 우리 미술계에서 희소성을 넘어 유일성을 자랑하다시피 하지만 희소하지도 않은 미술대학 간판도 없다. 1967년 경기도 파주 태생으로 단국대 사학과를 졸업한 사학도. 현대미술관이나 예술의 전당의 미술강좌는 열심히 쫓아다녔으나 교양인의 관심을 크게 뛰어넘은 것은 아니다. 소녀시절에는 미술보다 문학과 가까웠다.초등학교 시절부터 백일장에 나가 곧 잘 입상했고, 6학년 때는 전국 청소년 글짓기대회에서 노산 이은상에게서 초등부 대상을 받았다. 고1 때는 선배들을 젖히고 전국 백일장에서 장원이 됐다. "사학과에 간 것은 외할머니 때문이지요. 사대부 집안에서 자란 할머니는 조선왕조 오백년사를 꿰다시피 하여 밤새도록 역사이야기를 들려 주셨고 그것이 더없이 재미있었거든요." 고교 때는 역사부장을 맡았는데 가끔 역사선생님이 교단에 세워 자기 대신 이야기하라고 했다. 재미있는 얘기가 나올 만한 대목에서다.교단에서 이야기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던 여고생은 지금 연단이라는 비슷한 위치에서 동료 아닌 컬렉터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 "어렸을 때는 욕심이 많아 하고 싶은 일이 많았어요. 초등학교 때 웅변대회에서 대상을 받는 한편 발레에도 소질을 보였거든요. 고교 때는 규율부장도 맡아 통솔력도 인정받았구요." 미인형에다 몸매가 날씬해 문외한의 눈으로는 발레리나로서 모자란 구석을 찾을 수 없다. 웅변도 그렇다. 브루투스와 안토니우스의 이야기처럼 대중은 웅변에 따라 이리저리 쏠린다. 정가가 없어 참가자들이 갈팡질팡하는 경매에서 경매사는 망치를 든 웅변가이자 통솔자다. 그는 대학에 들어가자 저널리스트로 갈길을 정했다. "사학과에서 답사할 때 저의 꼼꼼한 메모는 유별났어요. 그래선지 사학과 학회지의 편집장을 맡게 돼 원고지와 씨름하자 글짓기하던 기억도 떠올라 저널리스트를 꿈꾸게 됐습니다." 원고지와의 진짜 씨름은 학교방송에서 3개의 프로를 맡으면서부터였다. 매주 100장의 원고를 썼다. 90년 대학을 졸업하자 저널리스트의 꿈도 접고 광고대행사에서 일했다. 그러나 박혜경의 강점은 가장 평범한 미덕인 부지런함이다. 열심히 일하다 보니 어느새 '모범사원'이 됐고, 얼마 후에는 진로그룹으로 옮겨 사보에 '열심히 일하는 여성'으로 소개됐다. 그러자 가나아트가 미술경매사로 스카웃해 그는 96년부터 2년간 아트디렉터이자 큐레이터로 일하는 한편 LG의 케이블TV(채널45)에서 미술품판매 프로를 맡았다. 가나아트가 미술전공도 아닌 그를 채용한 속내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동안 닦은 글짓기와 웅변실력에다 마이크솜씨, 영상에 더 없이 걸맞은 용모와 매너 때문이라고 짐작할 따름이다. 동기와 상관없이 서울경매는 스타를 배출했고 그것은 미술계의 축복이었다. "저를 두고 '여성 경매사의 출현'이라고 하는 것은 성차별 시비를 떠나 핵심과 거리가 있어요. '경매'의 미술사적 의미를 너무 가볍게 보는 것 아닙니까." 뒤집어 말해 경매가 없는 미술은 '현대' 이전의 그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생긴 게 한 세대 전이고 자칭 타칭 '세계적 거장'들이 쏟아지는 판에 경매가 없다고 현대미술이 아니란 말인가.과장끼는 있어도 그것은 사실이다. 현대의 예술은 시장에서 자라고 경매가 없는 미술은 그 전단계다. 경매라는 공개시장이 없이 '발전'해온 우리 미술은 허우대만 큰 미숙아다. 70년대부터 미술품값이 폭등한 것도 그렇다.65년 박수근 화백은 가난 속에 눈을 감았으니 몇년 사이에 미술계의 '한강변의 기적'이라도 일어났단 말인가. '기적'이란 원래 실없는 소리지만 예술에서는 더 그렇다. 한국에서 미술품이 비싸진 것은 미술이 아니라 경제가, 특히 건설산업이 발전한 결과다. 70년대 들어 갑자기 주거가 넓어지자 거실의 빈 벽을 장식하는 것이 일이었다.대문짝 같은 명화달력이 다투어 나왔다. 브리태니카 백과사전도 불티나게 팔렸다. ABC도 모르는 이들이 브리태니카를 샀다고 비웃는 것은 더 어리석다.브리태니카는 내용도 좋으나 장정도 품위 있어 거실을 장식하기에 더 없이 좋다. 거실을 수레바퀴로 장식하느냐 브리태니카로 장식하느냐는 선택일 뿐이다. 그런 식으로 미술품값은 올라도 경매가 이루어질 바탕은 없었다.많은 컬렉터들에게 미술품 거래는 투자였다. 아파트값처럼 그림값이 오르리라고 작품을 사재기 하던 '미부인'들의 미술상식이 복부인보다 앞설 것은 없었다. "미술품값은 떨어지지 않는다는 신화가 생겼지요. 거품이 빠진 지금도 그것을 모르는 이들이 있어 출품자와 작품 내정가를 정할 때 어려움을 겪습니다. 내정가가 20∼30년 전에 샀던 값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선에서 오가면 내 작품이 장물이냐며 화를 내요." 재산 은닉의 수단으로 미술품을 사들이는 풍토도 경매를 가로막는다. 검은돈이나 주체 못하게 넘치는 돈으로 작품을 사는 데 자취를 남기는 경매를 택할 이유가 없었다. 공급자인 화랑과 작가의 사정도 경매를 막고 있다. 스포츠나 바둑처럼 기록이나 계가가 통하지 않는 미술에서 그림값은 어차피 시끄러운 문제다. 선진국들은 이 뜨거운 감자를 경매에 떠넘기나, 바로 그래서 한국에서 경매는 어렵다. 한국 작가들에게 작품값은 '상업적 가치'가 아닌 '사람값'으로 통했다. 특히 후배보다 낮은 값을 받는다는 것은 가계부의 문제가 아니라 '타락'이나 '파멸'이다. 작가들도 나름대로 자신의 작품을 시장기준에서 '계가'를 하나 공개적으로 후배의 하수가 되기는 싫어한다. 여기서 생겨나는 것이 2중가격제. 작가와 화랑이 짜고 대외용의 높은 값을 정하나 실가는 화랑과 컬렉터가 따로 정한다.한 가격은 전시작품에 쓰여 있고 다른 한 가격은 전시장 안쪽 화상의 응접실에서 귓속말로 정하나 그것은 컬렉터에 따라 높낮이가 달라진다. 바로 그래서 경매가 필요하다고 박혜경은 힘을 준다. 전통적 인습으로 경매가 어렵다는 말은 역으로 경매가 정착되면 구습이 많이 타파된다는 것이다. 최근 들어서 작가들도 경매를 환영한다. 2중가격은 쑥스럽고 피곤할 뿐 애호가와 거리만 멀게해서다. "한국은 경매의 불모지가 아니지요. 불과 2년이 지났으나 재작년과 지난해가 달랐어요. 첫해는 IMF 때여서인지 낙찰률이 30% 수준이었으나 지난해 옥션 하우스를 개관한 이후 1년간은 40∼50%로 올라섰고 매출액은 2배 이상 올라섰거든요." 활짝 웃는 박혜경. 편안한 얼굴이다. 타고난 외모와 자질에다 후천적 노력을 아낌없이 쏟는 데서 오는 그늘진 데 없는 얼굴이다. 경매사를 파는 경매가 있다면 그의 내정가는 얼마로 해야 하는가.<글 양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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