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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09 (09:40) from 205.251.78.227' of 205.251.78.227'	Article Number : 647
장백일	Access : 439 , Lines : 35

홍순훈선생의 글은 참신한 내용을...

정길현 wrote:

"학문외적인 목적이나 가치가 개입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귀하의 주장은 역사연구의 성질을 처음부터 간과하는 것입니다." 라는 말씀은 실증사학의 기본 특성을 완전히 무시하는 발언이라고 생각되는군요. 기본적으로 실증사학이란 어떤 역사 연구에 있어서의 가치평가나 그 기준이 아니라 연구의 방법론입니다. 실증주의의 토대는 사실을 그대로 복원하고자 하는 랑케적인 시각이겠지요. 물론 그것도 하나의 가치로 주장하시겠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만, 귀하가 말씀하시는 역사연구의 성질로써 파악되는 목적이라고 보기는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귀하의 논리에 따른다면 실증사학이야말로 역사연구의 본질에서 벗어난 무지한 사고방식이라는 이야기가 되는군요.

어째서 이런 말씀을 하시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실증사학을 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까. 역사연구에 학문외적 목적이나 가치가 개입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전통의 창조"를 어떤 시각에서 시도하느냐에 따라 연구자의 학문외적 목적이나 가치가 역사연구에 개입하게 되기 마련이다, 그 결과 역사관의 다양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귀하는 "학문 외적인 목적으로 사실을 편집, 왜곡하여 그릇된 역사관을 세우는 것은 분명 다양성이라는 측면을 검토하더라도 인정될 수 없다"고 말씀하시니까 옳지 않다,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귀하는 이병도가 식민사관을 가르쳤다는 서울대 사학과를 탓하는데, 거기에는 반식민주의라는 귀하 나름의 "학문외적 목적이나 가치"가 개입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귀하의 말씀에 모순이 있다, 이런 지적을 한 것입니다.

"실증사학"을 흔히 랑케에 관련시켜서 설명하는 일이 아닌게아니라 있습니다. 그러나 잘 아시겠습니다만 실제로 한국이나 일본의 역사학자들이 이 말을 사용할 때는 랑케류의 실증사학이라는 뜻으로 쓰지 않습니다. 되도록 선입견을 가지고 사실(史實)을 해석하지 말고, 주장을 내세울 때도 사실에 입각해야 한다는 입장 정도의 뜻으로 이 말을 씁니다. "사실을 그대로 복원하고자 하는" 것은 반드시 랑케류의 실증주의에 한하는 일이 아닙니다. 혹시 사학과에 다니신 분이라면 "히스토리오그라피" 강좌에서 읽으라고 한 책들에서 무슨 말을 했던지 회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실의 복원은 그것의 해석에 선행하는 작업입니다. 역사학자라면 누구나 마땅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혹시 랑케를 그후에 인간활동의 인과관계를 구명하는 정밀과학으로서 역사학을 말하던 분들에 연결시키면서 하시는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만약 그러시다면 그것은 한국의 상황에 전연 적용이 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한국에는 그런 역사학자가 이제까지 있지 않았습니다.

정길현 wrote:

그리고 제가 왜 이병도를 식민사학자라고 규정하는지 그 사실관계를 밝히기에 앞서 먼저 밝혀야 할 점이 있는데, 그것은 귀하가 제 관점을 왜곡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의도적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귀하는 '왜곡된 관점을 가진 이유를 서울대 사학과생이라는 데서 찾을 수 있다.'라는 제 주장을 '서울대 사학과생이기 때문에 왜곡된 관점을 지녔다.'라는 식으로 호도하셨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마치 제가 '서울대 사학과생은 이병도 때문에 전부 식민사학자가 되었다.'라는 편견을 가진 듯이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런 부분을 전체로 확대하는 오류를 범했다면 귀하의 사례를 든 비판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겠습니다만,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귀하의 무리한 논리전개는 부분과 전체를 혼동하는 오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식민사관을 가진 사람들이 서울대 사학과생의 전체를 차지하지 않듯이 피아제나 맑스와 같은 사람들도 일부분일 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베를린대학에서 가능한 일이 서울대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하신다면 그것은 역시 배외주의(拜外主義)고 "식민사관"과 오십보백보입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인식에 기>초한 발언이라고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호도"(糊塗)라는 말은 "풀칠"이라는 뜻입니다만 귀하의 말씀에서 쓰이는 이 말을 "곡해"라는 뜻으로 풀이하기로 하겠습니다. '왜곡된 관점을 가진 이유를 서울대 사학과 [출신]이라는 데서 찾을 수 있다'는 말은 '서울대 사학과 [출신]이기 때문에 왜곡된 관점을 지녔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어디 곡해가 되겠습니까. 서울대 사학과에서는 초창기에 이병도가 식민사학을 가르쳤고, 나중에는 그의 제자들이 이어서 식민사학을 가르쳤으니까, 거기서 공부한 자들은 이병도류의 식민사학을 접수한 자들이다, 이런 뜻으로 두 번에 걸쳐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는 귀하께서 서울대 사학과 출신의 대다수는 이병도류의 식민사학을 접수하였지만 일부는 그러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뜻으로 말씀하시는 듯합니다만 이 점에도 의문의 여지가 있습니다. 가르침이란 말로써 이루어지는데 말이란 화자의 입을 떠나 청자의 귀에 가 닿는 순간 변질합니다. 화자의 가치가 깃들인 말이 청자의 가치에 의해서 여과되어 화자의 메시지 (M)와는 다른 새로운 메시지 (M')가 창출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병도의 가르침 T가 그의 제자에게 전달되면 거기서 일차적 변질이 이루어져 T'가 되고, 그것이 손제자, 손손제자로 전발되면 T'', T'''로 이차, 삼차적으로 변질됩니다. 그러므로 설사 이병도가 식민사관을 가르쳤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접수하는 제자들은 저마다 다른 메시지를 접수하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서울대 사학과 출신은 열이면 열, 백이면 백이 다 제각기 다른 메시지를 받고 교문을 나갔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만약 이병도가 식민사관을 가르쳤다면 그의 제자, 손제자, 손손제자들은 열가지 백가지의 식민사관을 가지게 됐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되면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이미 식민사관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병도의 가르침이 식민사관이었다고 하시는 귀하의 말씀에서 식민사관이라는 것이 마치 물건처럼 고정된 실체를 가지는 것이라고 가정하시는 귀하의 관점에 있다고 봅니다. 어떤 물건이 스승한테서 제자한테, 그리고 손제자, 손손제자한테 전해지듯이 식민사관이 그렇게 전달되었다고 보시는 시각입니다. 이 시각은 무리입니다. 서울대 사학과를 보는 편견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길현 wrote:

 이병도가 왜 식민사학자인가? 그 부분에 대해서도 성실한 답변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만, 본인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아직 상세하게 그 내용이 정리되지 못했습니다. 다음에는 꼭 정리해서 보여드리겠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조선사편수회에서 친일적인 목적에 입각, 적극적으로 연구에 몰두했던 이병도의 행동과 그 당시 일제치하 비참한 사회에 대한 진지한 의식이 없이 교편을 잡았던 백남운의 활동을 동일선상에 놓고 보는 것은 억지라고 볼 수 있다는 점만 밝혀두겠습니다.

이병도의 사학이 왜 식민사학이라는지 듣고 싶습니다. 다만 지금 이 시점에서 저는 이런 말씀을 드릴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사편수회가 총독부 사업이었으니까 식민주의자들의 이익에 부합되는 일을 했다고 일응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병도가 거기에 관계했다면 식민주의자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활동을 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사편수회에서 한 일이 모두 식민주의자들의 이익에 부합되는 일이었다고 하면 그것은 무리입니다. 식민주의자도 때로는 식민주의 아닌 일을 하고, 공산주자도 공산주의와 무관한 일을 하듯이, 식민주의자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일을 하던 조선사편수회의 종사원도 때로는, 또는 경우에 따라서는, 식민주의와는 무관한 일을 했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가령 유신시절에 대학교수하던 분들은 대개 유신에 찬양 동조하거나 순응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 모두를 유신의 공범자나 종범자로 몰 수는 없습니다. 유신 때 대학교수를 하면서도 유신을 알게 모르게 비판한 분들도 있었습니다. 단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병도도 그가 조선사편수회에 가담했다는 단지 그 사실만을 가지고 그를 식민사관의 소지자라고 몰아세운다면 그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역사학은, 역사학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학문분야는, 그리고 한국의 경제, 사회제도는, 한국의 철도, 도로 등도 모두, 사실은 일제가 남겨놓은 인프라스트럭쳐와 노우하우를 토대로 해서 성장발달했습니다. 물론 일제의 잔재를 청산해야겠지만 일제에 연결되니까 무조건 배격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곤란합니다. 누구를 친일인사라고 낙인찍고 배척하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한국의 근대화라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일제의 잔재 가운데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할 것인지를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병도의 사학도 그런 면에서 다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병도의 진단학회에 속하던 서울대 사학과의 역사학자들이 조그만 사실 하나를 침소봉대해서 해석하는 역사연구법을 경계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사학과뿐만 아니라 서울대의 여러 학과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던 도식적 마륵시즘을 경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도식적 마륵시즘에 심취해 있던 분들은 그런 이병도류의 학풍을 "실증주의"니 "식민사관"이니 하고 불렀습니다. 자기들의 정치적 입장에 쉽사리 동조하지 않기 때문이었지요. 저는 홍순훈선생처럼 60년대에 대학에 다녔습니다만 그런 말을 무시로 들었고 옳다고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60 가까이 된 지금의 제가 돌아보기에는 도식적 마륵시스트들이 잘못이었습니다. 사실의 확인을 뛰어넘어 섣불리 기존의 이론이나 사관이나 정치적 입장에 비추어 과대한 해석을 자행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경향에 쉽사리 동조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정치나 공허한 이론은 무성하되 학문은 성장을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역사학이 공념불로 끝나고 만 것입니다. 이병도의 실증사학이 -- 만약 그것이 실증사학이라고 한다면 -- 지닐 수 있는 긍정적인 면을 배격해서는 안 됩니다.

아뭏든 애국심의 정치만으로 역사를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서울대 사학과 출신" 홍순훈선생의 글은 참으로 참신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