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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06 (20:37) from 205.251.78.227' of 205.251.78.227'	Article Number : 641
장백일	Access : 375 , Lines : 29

Re: 서울대 사학과가 어때서요?

말씀하신 내용의 어디에도 홍순훈선생이 이병도의 식민사학풍이 지배하는 서울대 사학과 출신이니까 그분의 역사인식이 엉망이라는 귀하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대목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귀하의 발언 하나하나에서 무리한 "알리게이션"을 볼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런지 설명하지요.

1. "학문 외적인 목적으로 사실을 편집, 왜곡하여 그릇된 역사관을 세우는 것은 분명 다양성이라는 측면을 검토하더라도 인정될 수 없다"는 말씀에 대해서.

역사연구에서 다양성은 연구의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거나 가치인 것은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역사연구란 홉스바움이 말한 "전통의 발명"이라는 시각에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전통을 발명할 필요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동일한 사료에 가하는 설명이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학문외적인 목적이나 가치가 개입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귀하의 주장은 역사연구의 성질을 처음부터 간과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병도의 사학이 식민사학이라는 귀하의 주장에서 저는 식민사학이 아니라 민족사학이나 애국사학이어야 한다는 귀하 나름의 "역사외적" 목적이나 가치가 명료하게 보인다고 하겠습니다.

2. 이병도가 간여한 조선사편수회가 (그리고 아마도 진단학회도) 식민사학을 추구했고 조선사편수회의 식민사학적 역사인식을 후진에게 주입시켰다는 주장에 대해서.

역사선생이 자기의 역사관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이병도가 식민사학을 포지한 자였다고 전제한다면 그가 식민사학을 제자들에게 가르쳤고, 그의 가르침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제자들도 역시 자기의 제들에게 그런 식민사학을 가르쳤다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또 받아들이지 않는 제자가 학점이나 취직에서 불리익을 당하게 되는 일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의문은 식민사학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이냐, 그리고 이병도가 과연 식민사학의 포지자였느냐 하는 두 점입니다.

만약 식민사학이 외세의 식민지지배를 정당화하겠다는 목적이나 가치를 추구하면서 이룩한 역사학이라는 뜻이라고 한다면 귀하는 먼저 이병도의 연구물이 그러한 목적이나 가치를 추구했다는 점을 입증해야만 합니다. 만약 그가 (신채호나 백남운, 전석담처럼) 외세에 대항한다는 정치적 목적을 분명히 드러내지 않고 객관적 사실의 발견에 주력했다는 점 하나만 가지고 그가 식민사학이라고 하신다면 그것은 무리입니다. 이병도가 일제(나 미제)의 식민지통치를 옹호하고 뒷받침하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한 문헌이 과연 있습니까.

만약 이병도가 조선총독부 소속의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한 바 있으므로 그가 식민사관의 포지자였다고 하신다면 그것은 백남운은 강화에서 공립학교 교원을 했으니까 친일교육자였다고 하는 것처럼 위험한 말씀입니다.

3. 이병도의 권위주의적이 교수법에 관련해서 이병도는 "말년에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기 전까지, 제자들에게 왜곡된 사관을 강요했으며 이를 따르지 않는 이들을 불공정하게 대우했"고, "그로부터 사사받은 이들은 각 대학의 교수직을 꿰차면서 일종의 거대한 학맥을 형성했고 이들의 주장은 대한민국 역사학계에서 주된 학설로 자리잡게 되었"다는 귀하의 주장에 대하여.

귀하의 이러한 주장이 마륵스가 스승 브루너 바우어의 학설을 통렬히 비난한 예도 있다는 저의 지적에 반론은 되지 못합니다. 브루너 바우어는 마륵스에게 베를린대학의 교수직을 주기로 약속했었습니다. 비록 정치적 이유 때문에 파면당함으로 해서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말았습니다만.

이병도와 제자들 사이에도 제자가 스승의 학설을 거부하거나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예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서울대 사학과출신도 아니고 한국사 전공도 아닙니다만 그렇게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만약 베를린대학에서 가능한 일이 서울대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하신다면 그것은 역시 배외주의(拜外主義)고 "식민사관"과 오십보백보입니다.

가령 심리학자 쟝 피아제는 교리를 주입시키는 천주교학교에 다니는 무신론자였지만 전과목에서 탁월한 성적을 올린 것으로 유명합니다. 스승이 원하는 대로 답안을 마련하기는 하지만 나는 내 판단대로 학문한다는 배짱이었습니다. 서울대 사학과에도 그런 학생은 얼마든지 있었을 수 있습니다. 이점에 대해서도 만약 스위스의 학교에서 가능한 일이 서울대 사학과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하신다면 그것도 역시 배외주의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서울대 사학과에는 주관도 없고 제 머리로 판단할 수 없는 자들만이 간다고 가정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자, 그렇다면 시각을 바꾸어서 문제를 바라봅시다. 역사연구에서 사실의 발견을 중시하고 되도록 사실에 입각해서 역사를 "이야기"하겠다는 이병도류의 실증주의가 과연 "식민사학"이라는 이름으로 손가락질당해야 하겠습니까. 한국사의 연구는 민족사의 연구고 민족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정치적 입장을 앞으로 언제까지 지탱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역사를 공부하신 분 같으니까 잘 아시겠지만 이 나라에서 "민족"이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10년대 말부터입니다. 극히 최근에 만들어낸 "민족"이라는 자를 가지고 이전 수년년의 사료를 재단하고 처리해도 좋겠습니까.

서양의 나라들은 젖혀놓더라도, 이 나라를 식민지로 지배했던 일본에서도 벌써 오래 전부터 역사학자들이 "일본민족"이라는 편협한 시각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식민사관의 포지자들한테 배우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그들의 스승들은 권위주의적이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홍순훈선생의 참신한 글이야말로 귀하처럼 통속적인 "애국주의" 사관에 사로잡힌 분들이 주의깊게 읽을 만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 애국주의 사관을 고집하시겠다면 그래도 무방하겠습니다. 그러나 누가 거기에 동조하지 않는다고 해서 "사관이 엉망"이라고 이런 자리에서 매도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