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2월 23일 칼럼니스트 COLUMNIST No.187
1999.09.19 창간 서울칼럼니스트모임 (Seoul Columnists Society) 주4~5회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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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 보기 *누구나 칼럼 *의견함
명예 그 이후를 더 아름답게

언젠가 AFKN TV를 켜니 건설공사장에서 일하는 지미 카터 전 미국대통령이 나왔다. 으레 그렇고 그런 프로그램이려니 하고 채널을 돌리려던 순간 확 눈길을 끄는 게 있어 말을 잘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계속 지켜보게 되었다.

1980년 대통령선거에서 패한 뒤 고향 플레인스로 돌아가 봉사활동을 한다는 것이 그때까지 그에 대한 기억과 관심의 전부였다. 그런 그가 TV 화면에 나타났으니 무슨 흥미가 생길 것인가. 더구나 퇴역 대통령, 정치인들이 툭하면 내세우는 봉사활동이란 것에 대해 별로 좋지 않은 고정관념을 가진 터라 더욱 그랬다.

그러나 해비타트(사랑의 집짓기 운동) 회원으로 공사장에서 일하는 그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곧 빨려 들어갔다. 공구띠를 허리에 차고 직접 못질을 하는 등 다른 회원들과 똑같이 일 하는 것도 그렇지만 솜씨가 완전 프로인 것이 놀라웠다. 식사시간에 각자 가져온 점심을 꺼내 먹고 차도 제각각 알아서 마시는 것이었다. 전직 대통령이건 여성회원이건 마찬가지였다. 가난한 이들에게 집을 지어주는 현장에서 여러 사람들과 뒤섞여 열심히 일하는 그가 그렇게 신선해 보일 수 없었다.

우리도 전직 대통령이 몇 명 있지만 불행히도 카터 같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설령 그렇게 봉사활동에 나선 이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 현장의 모습은 어떨까. 수십명에 가까운 추종자와 보도진에 둘러싸여 등장할 것이고 출처가 분명치 않은 금일봉이나 전달하며 악수와 뻔한 격려가 고작일 것이다. 일하던 사람들은 그들이 돌아갈 때까지 뒤치다꺼리로 정신없을 테고.

과거 서독 번영의 기틀을 마련했던 초대 수상 아데나워가 87살에 사임한 뒤 여생을 실패로 끝낸 것과는 대조적인 삶을 카터는 살고 있는 것이다. 아데나워는 퇴임하면서 어느 기자에게 '가벼운 마음으로 떠난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위장된 겸손이었다. 권력과 영향력을 상실한 그는 그 공백을 잘 극복하지 못해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철녀로 불렸던 마가렛 대처 영국수상도 퇴임 뒤 권력 박탈감을 술로 달래며 툭하면 후임인 메이저 수상을 괴롭혔다. 지난 날에 대한 집착 때문에 힘들게 획득했던 명예를 스스로 밟아 버린 것이다. 이들 말고도 그런 사람들은 많다. 우리나라에서도 현직을 떠난 뒤 자기 본연의 삶을 새로 찾지 못해 빛나는 과거의 명예를 추하게 만든 이들이 적지 않다.

카터는 그런 점에서 분명히 명예 이후를 더 아름답게 하는 데 성공한 사람이다. 아데나워 나 대처보다 그의 퇴임은 더 비참했기에 영광은 훨씬 돋보인다.

"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백악관을 떠나야 했을 때 내 나이 겨우 56살이었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나의 부끄러운 패배를 알고 있다는 사실은 내 실직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농장은 빚이 백만달러를 넘어 파산위기에 처했다. 워싱턴에서 플레인스로 오면서 지난 과거를 잊는 것이 쉽지 않았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오직 현재 생활에 집중해 야 하는 것이 어려워 마음이 아팠다.

우리는 간절히 이 나라 대통령으로 4년 더 일하기를 바랐으나 그렇지 못했다. 아내 로잘린은 선거 결과를 냉정하게 받아들이지 못해 고통과 분노에 시달렸다 .재임기간 몇 가지 중요한 업적을 이루었고 늘 최선을 다했음을 강조하면서 우리 인생의 좀 더 긍정적인 면을 보려고 노력했지만 내가 무어라 말하고 행동하건 간에 미래에 대한 기쁨과 확신을 아내가 갖게 하기는 어려웠다."

그의 저서 '나이 드는 것의 미덕' 에 드러난 퇴임 후 심정을 간추려 본 것이다. 백악관을 떠날 때 참모진과 각료들은 그에게 목공 공구세트를 작별 선물로 주었다. 그걸 계기로 관련 서적을 읽고 연구하거나 주말학교를 다니면서 이음새 처리, 마감질 등을 배웠고 100여점의 가구를 디자인해 제작하기도 했다.

이는 그가 인생의 궁극적 성공을 이루어 가는 데 지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인구 700여명밖에 되지 않는 고향을 비롯 세계 여러나라를 돌아다니면서 빈곤퇴치,질병예방,바른 정치 확립 등을 위한 갖가지 봉사활동을 펴고 있다. 그 가운데서 그런 기회와 지혜를 갖게 된 데 대해 늘 감사하며 궁극적 성공에는 자신의 행복, 만족, 평화, 기쁨과 자기 만족감 같은 단순한 것들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고대 중국 진나라의 여불위가 편찬한 '여씨춘추'에 따르면 명예는 메아리와 같은 것이어서 혼자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소리를 질러야 따라 오는 것이다. 단 그 소리가 올바르고 아름다운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메아리만 아름다울 수는 없다.

또 진정한 명예는 명예욕을 버릴 때 얻을 수 있다. 과거의 명성에 집착하거나 억지로 남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려 해서는 불가능하다. 카터는 이런 점들을 누구보다도 잘 터득하고 실행에 옮긴 것이다. 지른 소리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메아리가 그래서 돌아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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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호

칼럼니스트
2000.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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