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2월 6일 칼럼니스트 COLUMNIST No.175
1999.09.19 창간 서울칼럼니스트모임 (Seoul Columnists Society) 주4~5회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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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6일 [그해오늘은] 그의 '召天'



1945년 오늘 윤치호(尹致昊)가 '소천'(召天)에 따른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윤치호는 하늘이 부른 것이 아니라 자살한다.

실은 1865년 아산 태생인 윤치호의 삶 자체가 '자살'과 '소천'처럼 엇갈린다. 그는 정치가 교육가 민족운동가에다 '독립운동가'로도 기록되나 광복이 되던 해 자살로 삶을 마감한 '친일파'이기도 하다.

그것은 타고난 개화지식인으로서의 운명인지 모른다. 16세에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에 가서 2년을 머물며 신학문을 배웠고 갑신정변 직후에는 10년이나 망명한다.

1895년 귀국하자 이듬해 민영환을 수행해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도 참가했다.

그런 경험은 1898년 독립협회의 2대 회장이자 독립신문 사장으로서 진가를 보인다. 그해 10월에 주최한 만민공동회는 한국의 첫 대중 정치운동이기도 했다.

1904년에는 외무협판에도 오르나 을사조약 이후 관직을 떠나 개성에서 한영학원을 열었다. 애국가 가사도 그가 지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그의 자태는 '남산 위의 저 소나무'였다.

그러나 1912년 105인 사건으로 3년여의 옥고를 치른 이후 그의 행보는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기미만세운동에는 얼굴도 내밀지 않다시피 했다. 차라리 그 길로 얼굴을 감출 일이지 일제말의 임전보국단 고문이나 귀족원 의원 등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젊은 시절 윤치호의 모습이 아까워선지 그의 노년이나 말기에 관한 기록은 흐릿하다. 정신문화연구원의 '민족문화 대사전'은 자살이라는 중요한 항목을 빠뜨리고 있다.

그러나 개화지식인들이 걸었던 길을 '소천'으로 흐릴 것이 아니라 밝히는 것은 오늘날 민족사의 '소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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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평
yangp@sgt.co.kr

세계일보 문화전문기자
세계일보 2000.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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