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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2월 2일 칼럼니스트 COLUMNIST No.173
1999.09.19 창간 서울칼럼니스트모임 (Seoul Columnists Society) 주4~5회 발행
http://columnist.org
*지난호 보기 *누구나 칼럼 *의견함
전화에 관한 여러가지 이야기들(1)

만약 인간이 일상생활을 해 나가는데 있어서 전화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말할 것도 없이 엄청나게 불편할 것이다. 우리들이 소유하고 있는 가전제품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아마도 10명중 절반이상이 전화라고 답할 지도 모른다.

우리는 생활의 3대 요소를 입고 먹고 자는 것, 즉 의·식·주라고 한다. 만약 생활의 4대 요소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필자는 서슴없이 통신이라고 말할 것이다. 어쩌면 의·식·주 이상으로 더 3중요한 것이 통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가져본다.

휴대폰사용자가 지난해 11월부터는 일반전화가입자수를 넘어섰고 현재는 2천6백여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불과 4∼5년전만 해도 특수층이나 부유층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휴대폰이  이제는 한 집에 몇 개씩이나 갖고 있는 온 국민의 통신기기로 자리잡은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전화라는 것이 부의 척도가 될 만큼 귀한 시대가 있었던 것을 생각하게 된다. 전화 때문에 여러 가지 불편을 겪었던 50대 나이의 필자에겐 전화에 대한 추억들이 떠오른다.

전화를 가진 것이 자랑스러웠던 시절이 우리에게 있었다. 그것도 겨우 20여년 전의 일이다. 80년대 이전만 해도 전화는 비싼 것이어서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않으면 집에 설치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전화를 한집에 두 대 이상 가진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정도로 설치비용이 많이 드는 「필수품」의 하나였다.

그때는 일반 전화상회에서 살 수 있는 백색전화가 있는가 하면 전화국에 설치신청을 하면 순서대로 기다렸다가 빠르면  몇 개월 후에, 늦으면 몇 년 뒤에나 쓸 수 있는 청색전화가 있었다.

그래서 고위 공직자나 신문기자 등 직업상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는 특혜(?)를 주어 일반인 보다 훨씬 빨리 전화가 가설해주었다. 당시 체신부나 전화국은 이런 특혜직업을 가진 사람은 물론 일반인들로부터 전화를 빨리 놓아달라는 청탁을 받는 것이 업무의 상당부분을 차지했던 것도 사실이다.

청색전화는 체신부에서 놓아주는 것이기 때문에 남에게 양도할 수 없는 것이었으나 백색전화는 개인소유여서 얼마든지 사고 팔 수 있었다. 그래서 당시의 전화상회는 전화기를 파는 곳이라기보다는 「전화번호」를 파는 곳으로 생각될 정도였다.

전화가 얼마나 귀하고 중요한 것이었느냐 하는 것은 70년까지만 해도 초·중·고등학교에서는 가정환경 조사를 할 때 전화유무가 조사항목에 들어있었던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실제로 전화가 있는 집은 부자였고 전화가 없으면 가난했다고 봐도 틀림이 없었다.

지난 70년대 중반 서울의 강남 땅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고 거주자가 늘어날 당시 영동전화국 관내의 백색전화 한 대 값이 자그마치 1백만∼1백20만원에 매매되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때는 신문에도 각 지역의 전화시세표를 싣는 것이 지금의 TV프로를 게재하는 것처럼 당연시되었다. 그만큼 전화 값이 얼마냐 하는 것이 관심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강북지역의 경우도 결코 싼 것이 아니어서 적어도 50만원 이상은 주어야 백색전화를 한 대 놓을 수 있었다.

이 같은 전화 한 대 값을 지금의 화폐가치로 따져 보면 적어도 5백만∼1천만원은 될 것 같다. 백색전화야말로 재산목록 최우선 순위에 들어갔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듯 싶다. 당시 집 한채 값이 서울시내 일반 주택의 경우 5백만원 안팎이었고 영동지역의 30여평짜리 아파트가 1천만원을 호가한 것에 비해 보면 전화의 가치가 얼마나 컸느냐 하는 것은 지금의 20, 30대 젊은이들은 쉽게 짐작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나라에 전화가 가설된 것은 1885년 9월28일. 당시 한성(서울)과 제물포(인천)간에 개통된 것이 최초였다. 최초의 전신시발지는 지금의 세종문화회관과 옛 광화문전화국 일대로서 이곳에 한성전보총국이 세워지면서 우리나라의 전기통신역사는 첫 페이지를 쓰게 된다. 세종문화회관 바로 옆에는 지금 한성전보총국이 그 자라에 있었음을 알려주는 표지석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전화가설과 관련해서 아주 흥미롭고 의미 있는 역사적 사실을 하나 소개한다. 일제시대 때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을 이끌어갔던 백범 김구선생이 1896년 사형선고를 받고 집행을 기다리고 있던 때였다.

일제 당국은 김구선생의 사형을 집행하기 위해 고종황제에게 결재를 올렸는데 이를 본 고종황제가 애국자를 사형시킬 수 없다는 생각에 제물포에 있는 형무소에 전화를 걸어 사형집행을 면하도록 한 것이다.

백범일지에는 시간적으로 1년간의 오차가 있는데 사형집행을 면제받은 1896년 10월5일자 일기에 「오늘은 서울과 인천간에 전화공사가 완공된지 3일째 되는 날이다」라고 적은 대목이 있다. 이는 전화가 가설된 지 3일 뒤에 김구선생이 고종황제의 칙명으로 목숨을 건졌다는 뜻이 된다.

그래서 한때 체신당국은 이 보다 사흘전인 10월2일을 전화시발일로 본 적이 있었다. 이후 확인 작업 끝에 이 보다 1년 앞선 시점인 1895년 9월28일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세계 최초로 전화가 발명된 날은 1876년 2월14일이었다. 이날 미국의 알렉산더 그래이엄 벨(Alexander Graham Bell)이 맨 먼저 특허를 신청했다. 다른 발명가인 엘리사 그레이도 같은 날 몇 시간 뒤 비슷한 특허를 신청했지만 불행히도 벨이 「전화기의 발명자」라는 영광을 안게 됐다. 벨의 전화기 실험이 성공한 날은 특허를 신청한지 한 달이 조금 안된 3월10일이다.

한편 전기 임펄스를 이용한 최초의 전화기는 1849년 쿠바의 아바나에 살고 있던 안토니오 메우치라는 사람이 만들었다. 그는 자기 집 1층에서 3층에 병으로 누워있는 아내와 대화를 하기 위해 궁리 끝에 이걸 발명했다. 그는 너무 가난한 나머지 발명특허를 낼 돈이 없어 22년 뒤인 1871년에야 20달러를 꾸어 가지고 발명특허 보호권을 내게 되었다.

그러나 때는 늦어 이보다 11년 앞인 1860년에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근교에 살고있던 요한 필립 라이스란 사람이 바이올린 공명통을 이용해 소세지껍질로 진동을 시키는 방식의 송수화기를 단 전화기를 만들어 일반에 공개한 뒤였다.

프랑크푸르트 물리학회에서 이 소세지껍질 진통판 전화기를 발표할 때 90m짜리 전화선을 통해 노래도 몇 소절 내보냈고, 두 세 마디의 통화도 했다.

그러다가 알렉산더 그래이엄 벨이 등장, 사실상 전화기다운 최초의 제품을 만들어 낸 것이다. 1876년 3월10일 매서추세츠주 보스턴에서는 역사적인 첫 전화통화가 이루어졌다. 벨이 맨 처음 성공한 통화 내용은 조수 왓슨에게 "왓슨군 이리 좀 와 보게"라고 한 말이었다.

벨의 전화기는 같은 해 6월 25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미국독립 100주년 기념 박람회장에서 공개됐다. 브라질의 황제가 이날 전화기를 들고 실험통화를 했는데 그의 반응은 "아이구 깜짝이야. 이 기계가 정말로 말을 하는구나"였다고 한다.

1백여년전 벨이 전화를 만들 때만 하더라도 신기하기만 했던 첨단과학제품이었고 70년대에는 부의 상징으로까지 치부됐던 전화가 이제는 우리 인체의 신경조직이나 마찬가지로 없어서는 매우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전화야말로 우리 인간이 발명한 문명의 이기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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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일
월간 인터넷라이프 편집인.편집국장
2000.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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