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0월 16일 칼럼니스트 COLUMNIST No.141
1999.09.19 창간 서울칼럼니스트모임 (Seoul Columnists Society) 주3~5회 발행
http://columnist.org
*지난호 보기 *누구나 칼럼 *의견함

[21세기 문화 문화인] 작곡가 원일씨


   작곡가 원일씨는 철없는 아이처럼 음악의 장르간의 장벽은 물론 국경도 모른 체하며 '들어서 좋은 것'만 찾고 있다.

  "저는 음악적 재능이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실은 음악 이전에 그저 '소리'를 좋아했고 그래서 좋아하는 소리들을 줄곧 찾았을 뿐입니다.

어려서 밥을 먹다 아버님에게 얻어맞은 적이 있어요."

  빈 국그릇을 장단 맞추듯 두드리자 아버지는 복 달아난다며 야단을 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어렸을 적 그는 복이 없어 보였다.

초등학교 2학년 때는 성적이 전학년 꼴찌였다.

  그런 건 아랑곳않고 원일은 때려서 소리가 날 만한 것은 모두 악기처럼 두드렸다.

깨진 항아리,찌그러진 냄비,판자,막대기….

  쇠파이프나 대나무같이 관처럼 속이 빈 것은 기어이 구멍을 뚫고 불어보았다.

  "초등학교 때 아버님의 요양차 고양에서 몇년을 산 적이 있습니다.

서울과 다른 시골의 분위기여서 동네친구들과 그런 잡동사니들을 동시에 두드리고 불자 또 다른 음악이 됐어요.

땅바닥을 두드려서 나는 소리도 나름의 음악성이 있는듯 했지요."

  '음악성'이라는 대목에서 진지하다 못해 엄숙해진다.

그러나 안경 너머로는 아직 문짝이나 필통을 두드리던 개구쟁이 시절의 장난끼가 번득거린다.

  원일은 그처럼 명랑한 소년으로 자랐고 성적도 점차 올라갔다.

  가장 큰 행운은 중학교에서 밴드부에 들어간 것이다.

그는 중학이 아닌 밴드부에 진학한 셈이었고 클라리넷을 불기 시작했다.

  쇠파이프를불다가만난클라리넷은너무매혹적인악기였기에입이붓도록불어댔다.

  "어느날 국악고에 다니던 밴드부 선배가 놀러오기 전까지는 클라리넷보다 좋은 악기가 세상에 없을 것 같았어요.

그 선배가 단소를 가지고 있어 불려해도 너무 어려웠어요.

클라리넷보다 작은데다 구멍도 5개뿐인 간단한 구조여서 만만히 보았는데 말입니다."

  선배에게 단소를 가르쳐 달라고 조르자 아예 국악고에 놀러오라고 했다.

  남산의 국립국악고를 놀러간 그는 비로소 '국악'의 존재를 깨닫고 놀랐다.

  어려서부터 이런저런 소리를 내기 좋아했다지만 그에게 국악은 외국음악처럼 멀고도 낯선 음악이었다.

  국악고 출입이 잦아졌고 졸업후에는 아예 식구로 들어갔다.

중학시절의 클라리넷과 가장 가까운 피리를 전공했다.

  그러나 어려서 국그릇을 때리던 그에게 타악기는 남일 수 없었다.

국악고에서 사물놀이를 지도하던 사물놀이의  쇠잡이 김용배(작고)는 개구쟁이부터의 쇠잡이를 알아보았다.

  "선생님에게 쇠를 배우자 뭔가 고향에 오는 기분이었지요.

그때는 집이 다시 응암동으로 이사를 왔는데 학교가 끝나면 남산에서 집에까지 걸어가며 손바닥을 치며 연습을 했지요."

  오른손에 채를 들고 장갑 낀 왼손을 때려 장단을 맞추면서 집에까지 가다보면 두 시간이 짧았다.

  그가 악기를 익히는 과정은 '피나는 수련'이라기보다 '즐거운 놀이'이기도 했다.

  물론 그런 것은 대학입시와는 무관한 것이었다.

서울대 음대의 시험관들은 김용배와는 달랐기에 그는 진로를 추계예술대로 돌렸다.

모차르트나 베토벤이라도 뾰족한 방법이 없는 것이 그것이다.

  "추계예술대에 진학할 때는 기분이 상했으나 결과적으로 행운이었습니다.

장학생이 된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학교에 빠지지 않고 자유롭게 문화현장과 친할 수 있었거든요.

입학하자마자 친구들과 '소리 사위'그룹을 조직한 것도 그런거지요."

  대학에 들어간 1986년은 군사정권의 말기로 대학가가 온갖 시위로 시끄러울 때였고 그는 공연을 통해 이에 참가했다.

  신경림의 장시 '새재'를 음악극으로 공연한 것도 그런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작곡에도 손을 대게 돼 그의 대학시절은 여러가지로 바빴다.

  물론 학업에도 열심이었고 고교시절부터 불던 피리도 놓지 않아 90년 전국국악경연대회에서는 대상을 받았다.

상도 기뻤지만 그 부상격인 군면제는 그에게 3년의 시간을 주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계속 문화현장에서 뛰다 93년에는 본격적인타악그룹'푸리'를창단했다.사물놀이에바탕을두고외국음악을수용한것이다.

  "그룹활동을 할수록 작곡에 관심을 갖게 됐고 반응도 좋았어요.

그래서 94년에는 아예 중앙대 대학원 작곡과로 가서 본격적으로 공부했지요."

  바로 그해 서울무용제에 출연작 '족보'의 작곡으로 음악상을 받았다.

  이듬해는 문예진흥원이 주최한 가을 신작무대 최우수작곡자로 선정됐다.

작품은 '꽃상여'.

  그가 영화음악 작곡에 손대게 된 것은 장선우 감독이 영국영화연구소(BFI)의 의뢰로 한국의 영화사를 정리한 다큐물 '한국영화사 씻김'의 작곡을 부탁해서였다.

  '씻김'으로 만난 장선우는 95년 '꽃잎'의 작곡을 부탁했고 그 곡으로 이듬해 대종상 음악상을 받는다.

  그는 상과 함께 '영화음악가'라는 새로운 호칭을 얻었다.

  그때까지 한국영화에도 음악은 있었으나 영화음악가는 없다시피 했다.

  그는 무인지경 같은 영화음악계를 질주하듯 '강원도의 힘'(홍상수 감독) '아름다운 시절'(이광모) '이재수의 난'(박광수) '링'(김동빈)의 곡을 지어 넣었다.

  지난해는 '아름다운 시절'로 대종상 영평상 춘사상의 음악부문을 휩쓸었으니 밀레니엄의 마지막 해는 그에게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96년 겨울부터 1년간 그는 미국의 UCLA 민족음악학과 객원연구원으로 비교음악학을 연구했다.

  어려서부터 각종 음악에 관심을 가진 그에게는 세계의 음악을 폭넓게 공부하는 것이 꿈이었는데 문예진흥원의 최우수 작곡자가 돼 이를 이룬 것이다.

  상으로 군복무를 면제받고 거기서 얻은 세월을 상으로 유학했으니 상복이 터진 인생이다.

  "외국에 가면 갈수록 한국의 젊은이들이 외국에 자주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음악만의 이야기도 아닙니다.

어느 부문에서나 우물안개구리 식의 우월감이나 외국것을 무조건 경계하는 것은 우리를 낙후하게 할 뿐입니다."

  양악만을 중시하고 국악을 소홀히 하는 것도 안되나 지나치게 국악을 내세우는 것도 위험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한국인이 하는 음악은 모두 한국음악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는 우리 전통음악보다 그것에 바탕을 둔 창작곡을 들려주면 외국인들이 더 감탄하더라는 것이다.

  UCLA 시절 그는 창작곡집을 구상하여 97년 음반을 내놨다.

한국의 전통음악을 바탕으로 전세계의 모든 음악과 악기를 동원한 이 음반의 이름은 엉뚱하게 '아수라'.

  아수라(阿修羅)는 흔히 수라장이라는 말과 상통한 불교용어로 그가 본 우리 사회였다.

  아직 선진사회의 꿈에 젖어 있던 당시의 우리 사회에 개구쟁이 티를 벗어나지 못한 그가 던진 묵시록이었다.

  "끊임없이 세상을 삼키려고 하는/ 이 공간에는 찬란한 자본의 흔적만이/ 헤매이는 발길은 자신을 파괴하고/ 숨막혀 오는 열기는 모두를 미치게 만들었어/…"

  음반이 나온 지 한달만에 IMF가 터져 한국사회는 수라장이 됐고 그의 묵시록은 적중했다.

  그렇다고 음반이 IMF불황을 피할 수는 없어 그는 돈 대신 우리 음악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로 만족해야 했다.

또한 잘나가는 음악인이자 아직 개구쟁이같이 명랑한 그의 인생에서도 80년대의 대학가의 최루탄냄새는 지워지지 않고 있음도 드러났다.

  그렇다.

한국인이 하는 음악은 모두 한국음악이다.

-------------------------------------------
양 평

세계일보 문화전문기자
세계일보 2000.02
-------------------------------------------
http://columnist.org 서울칼럼니스트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