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0월 2일 칼럼니스트 COLUMNIST No.132
1999.09.19 창간 서울칼럼니스트모임 (Seoul Columnists Society) 주3~5회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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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 보기 *누구나 칼럼 *의견함
감기 예찬

감기에 자주 걸린 편이지만 아직 독감 예방접종을 한 적은 없다.감 기 정도는 걸리기도 하면서 사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병치레를 많이 해서 감기와 친숙한 탓에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감기로 고통받는 모든 이들에게 축복을. /자연은 그들 안으로 소 리 없이 스며들어가/그들을 서서히 쓰러뜨리고 조용히 뉘이었네./삶 을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인간이 얼마나 미약한 존 재인지를 깨달을 수 있도록/미열이 주는 깊은 몽상의 메시지를 받을 수 있도록./자연은 그렇게 우리들 안으로 스며들어 주었네./우리는 사려깊은 자연이 선사하는/인생에의 이 새로운 통찰에 감사를 드려야 하나니/우리는 불행을 가장해 날아든 이 작은 행복에 깊이 감사 드 린다네.〉

‘행복이 남긴 짧은 메모들’(풀빛미디어 발행)이란 책에 실린 오스 트레일리아의 카투니스트 마이클 루닉의 이 감기예찬에 나는 전적으 로 동감한다.지독한 고통이나 깊은 절망을 느끼지도 않으면서 삶을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고 인간이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 지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정말 감기가 주는 축복이 아닐까.그 런 점에서 도통 감기몸살이라고는 앓아 본 적이 없는 듯한 사람들에 게 연민을 느낀다.항상 기운이 넘쳐나는 듯한 그 건강한 사람들의, 아픈 사람 사정 이해 못하는 몰인정함(?)에 맞닥뜨릴 때 더욱 그러 하다.

“박제(剝製)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는 이상(李箱)의 소설 ‘날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육신이 흐느적 흐느적하도록 피로했을 때만 정신이 은화(銀貨)처럼 맑소.” 며칠 동 안 심한 몸살감기를 앓고 출근하는 길에 바로 이 구절이 실감으로 다 가왔다.원래 가벼운 몸무게가 더욱 줄어들어 내딛는 발걸음이 허공에 뜨는 듯한 순간,몸안의 불순물이 모두 빠져나가고 정신이 ‘은화처 럼’ 맑아진 듯한 느낌이 든 것이다.

그러나 올 가을에는 독감백신을 맞아 보기로 작정했다.지난 겨울 감 기를 호되게 앓은 탓이다.감기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일 나이도 이제 지났다는 생각도 들었다.그런데 공교롭게도 독감백신이 없다고 한다.세계보건기구(WHO)가 매년 4월께 유행이 예상되는 바이러스 균 주를 발표,거점 생산지역을 정해 생산토록 하는데 올해는 균주 발표 자체가 늦어져 원액 생산이 차질을 빚고 있다는 것이다.게다가 가수 요까지 겹쳐 물량부족 상태가 발생했다며 국립보건원은 시민들의 협 조를 당부하고 있다.65세 이상 노인,호흡기나 심장질환자,임산부,당 뇨·암환자 등을 제외한 건강한 사람은 독감백신을 맞을 필요가 없다 는데 어느 쪽에도 해당되지 않는다.결국 다시 감기와 친구할 수밖에 없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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任英淑 대한매일 논설위원실장
대한매일 2000.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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