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9월 28일 칼럼니스트 COLUMNIST No.130
1999.09.19 창간 서울칼럼니스트모임 (Seoul Columnists Society) 주3~4회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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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 보기 *누구나 칼럼 *의견함
이 땅이 싫어진 사람들

여행중인 일본인과 북한인 그리고 한국인이 점심시간에 파리의 고급식당에 들어가 똑같은 음식을 주문했다.그러나 조금 뒤 종업원이 오더니 어렵게 말을 꺼냈다.“미안합니다.광우병 파동으로 스테이크용 고기가 부족해 주문하신 음식을 내놓을 수 없게 됐습니다.다른 것을 주문하시지요”

그러자 부유한 국가 출신인 일본인이 물었다.“부족이란 말 처음 듣는데 그게 무슨 뜻이지요?” 식량난에 시달리는 북한인도 질문을 했다.“무엇을 보고 고기라 하는 건가요?” 세번째로 한국인이 종업원에게 물었다.“ ‘미안합니다’가 뭘 가리키는 거지요?”

한국에 온 미국인 의사가 김포공항에 도착한 지 30분 만에 들은 한국에 관한 우스개라며 언젠가 신문에 소개한 것이다.폐를 끼치고도 사과할 줄 모르는 무례한 한국인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이어 서울에 거주하는 동료 의사 8명을 만났는데 모두 한국이라면 질색을 했다.먼저 네 사람이 날마다 담배 반 갑 피우는 꼴의 대기오염,사고 확률이 미국의 10배인 교통무질서, 한국인들의 지나친 겉치레,김치냄새 등을 도저히 견딜 수 없다고 했다. 나머지 네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한국인들의 무례함을 지적하며 더 이상 머무르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쯤이면 우리들의 무례함이 외국인들에게 어느 정도 깊이 입력되어 있는지 짐작하고도 남을 만하다.동방몰염치무례지국이라고 비아냥거려도 할 말이 없을 정도다.같은 한국인인 우리들끼리도 이 때문에 얼마나 많은 불편을 겪는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

예절이란 어려운 것이 아니다.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방법으로 기초적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다.더욱 구체적으로 말하면 마음을 바르게 하고,자신을 아끼듯 남을 아끼며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하고,공중질서를 지키며 언행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세살 먹은 애들도 모두 대답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것은 물론 파괴도 서슴지 않는다.이런 현상이 사회의 각종 부조리와 모순을 낳고 희망과 꿈을 앗아가 제 나라이지만 만정이 다 떨어지게 한다.요즘만 해도 의약분업사태,한빛은행 불법대출,행보가 어지러운 남북관계,위태위태한 경제상황,추석 연휴의 어느 국회의원 승용차처럼 민심을 거스르고 역주행하는 정치권 등의 몰상식,몰염치,불공정에 넌더리를 치는 국민이 대다수다.그러면서도 미안하다거나 죄송하다는 책임자는 찾기가 어렵다.우스개 속의 한국인처럼 그런 단어가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단어 사용료가 엄청나게 비싸서일까.

그래서 환갑을 전후한 나이에 이민을 가거나 계획을 세우고 있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들짐승 날짐승도 날이 저물면 둥지로 날아들고, 사람 특히 한국인들은 고향의식이 강해 젊었을 때 떠났어도 나이가 들면 돌아오는 법인데 거꾸로 이 땅을 떠나려고 하는 것이다.

젊은 나이에 더 큰 물에 나가서 큰 뜻을 이루거나 자식들 교육을 위해서 이민을 가기 때문에 예전에는 40대만 되어도 늦다고 했다.그러나 국내에서 자식들 다 결혼시키고 무사히 정년퇴직까지 한 사람들이 여생이나마 이런 꼴을 보지 않고 살겠다며 떠날 채비를 하는 것이다.

그런 이들은 대부분 중산층 이상으로 이민갈 돈이면 국내에서 살아도 경제적 어려움은 그리 크지 않을 사람들이다.또 이민생활의 고통을 비교적 잘 안다.그럼에도 이 절망과 냉소의 척박한 땅에 질려 영원히 나가려는 것이다.50대 후반으로 이민을 준비 중인 동료에게 흔한 얘기로 조용한 시골로 가서 살면 되지 않느냐고 하니 거기는 이 나라 땅이 아니냐고 반문했다.낯선 시골에 가서 정착하려면 다른 나라에서 사는 것 못지않게 텃세 등 각종 걸림돌을 극복해야 하는 현실을 지적했다.

잠시 이 나라에 온 외국인들이나 이민갈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떠나면 그만이다.그러나 오만불손하기 이를 데 없는 권력과 금력의 무례함을 계속 견디며 살아가야 할 대다수 국민들의 좌절감,분노,상실감은 어찌할 것인가.

“몰상식한 사회에 분노하고 답답한 현실에 숨막혀 하면서도,이민조차 꿈꾸지 못하는 한심한 우리들.이제 마지막 남은 길은 복권을 사서 1등을 노려보는 수밖에 없는 것일까” 어느 젊은 영화인들이 인터넷에 올린 글의 일부이다.서민들의 현실과 심정을 아주 잘 묘사한 구절이라 하겠다. 그런 우리들에게 아직도 이 땅에 희망이 있다고 증명해 줄 근거는 없는가.나라를 경영하는 각계각층 사람들의 대답을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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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호

국민일보 논설위원
국민일보 2000.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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