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9월 15일 칼럼니스트 COLUMNIST No.121
1999.09.19 창간 서울칼럼니스트모임 (Seoul Columnists Society) 주3~4회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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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화해의 수학(數學)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가 나오기 전에도 소련의 인상은 그 언저리였다. 오히려 작품이 나오자 소련이 생지옥같지 않아 보였다. 금속성 기계같은 그 사회에 반체제지식인이라는 '유기체'가 살아 있음을 알게 돼서다.

오래 잊고 있던 솔제니친과 사하로프가 머리를 스친 것은 북한이 비전향 장기수들을 영웅으로 환대하는 소식 때문이다. 그들이 영웅이라면 우리는 뭐냐는 볼멘 소리도 들리나 여기에도 '수용소군도'의 논리는 통할듯 해서다.

그들이 영웅이라면 그 영웅들을 돌려 보낸 우리 사회는 인도주의 사회다. '피바다'의 '원남이'나 '꽃파는 처녀'의 '철용이'를 붙들었다가 돌려 보낸 셈이니 문학을 다시 써야할 패러다임의 변화다.

북한당국이 그 헛점을 가리려 해도 상식까지 가릴수는 없다. 북한동포들도 수백만 유태인들이 개스실에서 간단히 사라진 것은 알고 있다. 괴테와 베토벤의 나라가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은 남북이 총부리를 겨눠 장기수들이 생겨나기 직전의 일이다.

한마디로 장기수들은 그들의 이념을 지킨 영웅인 한편으로 우리의 참모습을 알리는 전도사다. 그들이 남북화해를 위해 힘쓰건 말건 이미 몸으로 전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귀환을 두고 어느 쪽이 득을 보고 어느 쪽이 손해보았다는 식의 수학도 재고할 싯점이다. 그것은 이제 남북이 민족공동체의 길을 가야할 싯점이기에 더 그렇다.

남북한 어느 쪽의 득이 다른 쪽의 실이라는 대결시대의 수학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도 꽤 오래 전의 일이다.

햇볕정책이라는 말도 모르던 1991년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남북 여자단일팀이 우승했을 때의 모습이 그랬다. 남북이 한 개의 컵을 나누어 갖게 됐으나 그 컵은 나눌수록 커져 7천만 동포가 그 안에서 환호했다.

1994년에 나온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는 한걸음 더 나아갔다. 남북한이 힘을 합쳐 일본의 침략에 대응한다는 줄거리여서 소설적 과장으로 차 있는듯 했으나 그 주제는 이미 현실화되고 있다.

지난달 25일 북일수교회담에서 정태화(鄭泰和)북한대표가 일본의 침략에대한 보상을 재산청구권으로 해결하려는 일본을 비난할 때 우리도 공감했다. "도카이도(東海道)철도의 침목 하나 하나에 조선인들의 시체가 깔려 있다"는 대목에서는 우리가 졸속처리한 대일국교정상화조약의 아픔이 다소 씻기는 기분이었다. 그것으로 35년전의 조약이 무효가 될 수는 없어도 우리 '민족'이 발언할 기회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그것은 민족공동체의 평범한 상식이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의 한구석에는 대결시대의 논리가 깔려 이를 받아 들이지 않고 있다. "납북자나 국군포로는 못 오는데 왜 장기수부터 보내느냐"는 발언도 그런 것이다.

여기엔 나름대로 논리가 있으나 남북대결은 수학적 공정을 기본으로 하는 스포츠 같은 것이 아니다. 남북한의 땅모습이 다르고 인구가 다르듯 분단은 체급경기처럼 시작된 것이 아니다. 낙동강까지 밀린 한쪽이 압록강까지 올라간 것도 야구의 공수교대같은 것은 아니다. 그처럼 평등할 수 없게 시작된 대결을 1차함수의 잣대로 풀려는 것은 무리다.

눈을 밖으로 돌려 우리가 35년전 체결한 일본과의 관계정상화조약을 왜 아직도 체결하지 않느냐고 따지는 것과도 비슷하다.

물론 남북한이 대결시대의 1차함수를 졸업하고 화해의 2차함수시대에 들어간 것은 아니다. 아직도 휴전선에서는 남북한의 청년들이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 따라서 이들 남북의 20대 청년들에게 서로는 '가상적'(假想敵)이다. 그러나 오늘날 남북의 어린이들은 통일된 조국이나 적어도 한민족 공동체를 함께 이끌어 나가게 될 '어깨동무'다. 그것은 허황한 희망사항이 아니라 역사의 바퀴가 고장나지 않는한 거치게 될 기차의 이정표다.

오늘날 우리가 혼란을 겪는 것은 이 두가지 수학이 뒤엉켜서다. 그 가운데 지난날의 악몽을 떨구지 못해 대결시대의 사고에 집착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다만 화해로 대결시대의 기득잇권을 잃게 되는 계층이 의도적으로 대결의 수학을 퍼뜨리는지는 눈을 부릅뜨고 지켜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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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평
세계일보 문화전문기자
세계일보 2000.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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