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8월 31일 칼럼니스트 COLUMNIST No.113
1999.09.19 창간 서울칼럼니스트모임 (Seoul Columnists Society) 주3~4회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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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문화 문화인] '한글누리' 대표 김슬옹씨


  '뚜벅이' '밍맹이' '조뙨관객' '걍' '똥딴지널포' '니미뽕' '삐뽀부대원'….

  지난날 공중변소 낙서판에서나 본 듯한 단어지만 이것들은 모두 사람 이름이다.

남을 놀리려는 별명도 아니고 스스로 지은 이름으로 요즘 인터넷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이름을 둘러싼 세태가 바뀌고 있는 것이다.

  '이름을 거룩히 빛내시며'라는 말을 믿든 말든 사람들은 자기 이름을 거룩하게 빛내고 싶어 우선 거룩한 이름부터 지으려 한다.

그래서 21세기에도 작명가들이 무더기로 실업자가 될 것 같지는 않다.

  이런 풍토도 바뀌고 있다.

수직적인 사회가 수평적인 사회로 바뀌고 있어 지난날의 위압적인 이름이 사라지고 있다.

한글세대의 등장으로 부모의 한문 실력을 자랑하는 듯한 이름도 자취를 감추어 가고 있다.

  컴퓨터도 이를 거든다.

인터넷 ID가 위와 같은 이름들을 쏟아내는 한편 새로운 스타일의 작명을 돕는 인터넷 서비스가 생겨나고 있다.

한글 이름을 짓도록 정보를 제공하는 (주)한글누리(대표 김슬옹.39)는 그 대표적인 경우.

  "'한글누리'라고 해서 한글 이름만 짓자는 것은 아닙니다.

이름만이 아니라 보통의 말에서도 너무 한글에만 매달리면 '우리말' 자체가 답답해져요.

우리가 오래 써서 친해진 외래어나 한문은 '우리말'로 수용하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김슬옹 대표는 '철수'를 예로 든다.

원래 '철수'의 '철'은 대체로 '哲'이나 '喆'에서 나왔고 '수'도 '洙'나 '秀' 같은 한문에서 나왔으나 이제 '철수'는 그런 한문적인 의미를 떠나 보편적인 우리 이름이 됐다는 것이다.

  갑자기 그가 너그러운체 하는 것만 같다.

그의 이름 '슬옹'을 떠올려서다.

'슬'기롭고 '옹'골차다는 뜻의 이 순한글 이름은 그가 고교시절 스스로 지어 호적 이름도 바꾸려고 재판까지 하려 했다.

그 학교가 철도고여서 더 놀랍다.

대체로 집안이 어렵고 착실한 학생들이 조용히 철도 공무원의 길을 배워나가는 학교의 분위기와 너무 어울리지 않아서다.

  "집안도 그런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어요.

증조부가 서당훈장이셨고 아버지가 한학을 하셔서 초등학교 시절부터 천자문을 배웠어요.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 비오는 날 우리 삼형제가 마당에서 토끼뜀을 하기도 했지요."

  그렇게 얻은 한문 지식이 거꾸로 오늘의 김슬옹을 낳았다.

고교에 가서 한문 이름표를 달고 보니 읽을 수 없는 이름들이 많았다.

나름대로 한자 실력이 있다고 본 그였기에 새삼 그것이 문제점으로 비쳤던 것이다.

  철도고에 간 것도 그랬다.

어려운 학생들이 많다 보니 신문배달을 하는 '달배' 친구들도 많아 일찍부터 신문을 대하게 되자 역시 모르는 한자들이 너무 많았다.

'신문이란 대중을 위한 것인데 꽤나 한자공부를 한 고교생도 모르는 한자를 써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고개를 쳐든 것이다.

그는 한글운동가가 되지 않았으면 언론비평가가 됐을 것만 같다.

  고1때 그는 한글학회의 고교생 단체인 '한글나무'에 들어갔다.

동료들과 함께 식당에 가서 '메뉴판'을 '차림표'로 바꾸도록 권하는 등 한글운동을 시작했다.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로 유명한 탤런트 서갑숙(徐甲淑)도 당시 숙명여고생으로 함께 일했지요.

그때도 적극적이고 명쾌했어요.

한글운동을 하는 여고생과 포르노 주인공이라면 거리가 한참 멀어 보이나 저희 눈에는 하나로 보입니다.

한글운동은 대중의 숨결을 억누르는 기존의 권위나 허위의식을 탈피하려는 운동의 측면이 있고 서갑숙의 그런 행동에서도 비슷한 점이 비칩니다."

  2학년이 되자 용성(庸性)이라는 본명을 한글이름으로 바꾸기로 했다.

당시 수원에서 기차통학을 하던 그는 새 이름을 짓다 수원을 지나쳐 천안까지 가고 말았다.

그러나 천안서 내릴 때 김용성은 김슬옹이 돼 있었다.

  철도고 학생은 기차 승차가 무료여서 천안까지 가는 작명길은 부담이 없었으나 그 이름을 써먹기는 어려웠다.

집안이 반대한데다 미성년자여서 개명을 위한 재판도 할 수 없었다.

  '김슬옹'이라는 이름표도 붙일 수 없었다.

담임은 국어교사여서 이해해 주었으나 학생주임이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슬옹'이라니 슬기로운 늙은이(翁)란 말이냐"라고 전교생 앞에서 야단을 치면서 이름표를 뜯어버리기도 했다.

덕택에 '김슬옹'은 전교에 알려졌고 교내에서 한글이름에 대한 관심도 생겨났다.

  고교시절에 이처럼 '한글학회사건'을 거친 그가 연세대 국문학과에 진학한 것은 고기가 물을 만난 격이었다.

2년간 철도공무원과 다른 직업으로 일한 뒤여서 이미 성년이 되어 그때까지 '가압류' 상태였던 '김슬옹'도 되찾았다.

  자신의 이름을 한글화한 그는 주변의 이름도 바꿔나가기 시작했다.

3학년때 지은 '동아리'는 그 대표적인 것이다.

연대 서클연합회의 '한글물결' 대표로 있던 그가 1984년 서클을 '동아리'로 바꾸자 이듬해부터 '동아리'는 전국의 대학가로 흘러갔고 그들이 졸업하자 일반사회로 스며들었다.

연세대에서 유명한 쉼터인 '솟을샘' '하얀샘'을 시작으로 옥호들에도 한글이름을 지어주었다.

  여기에는 시운도 따랐다.

그가 대학을 다니던 80년대 중반은 한참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높아 한문 위주의 기존문화가 힘없이 물러나고 있던 때였다.

  대학시절과 대학원 시절 공짜로 이름이나 지어주던 그는 졸업하자 한글이름을 위한 재판상담은 물론 그 비용까지 대주었다.

자신의 체험이 쓰라려서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이름에 대한 나름의 철학을 쌓고 보니 한글에만 치우치던 슬옹의 '우리말 이름'에 대한 인식도 달라졌다.

  "언젠가는 한 아주머니가 딸의 이름 때문에 찾아왔어요.

딸을 낳았을 때 남편이 술김에 '여왕'이라는 이름을 지어 호적에까지 올린 것입니다.

유치원에 다니는 딸이 주위의 놀림으로 자폐증을 앓을 지경이었다고 해서 '해랑'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지요."

  '해랑'이라면 연극인 이해랑(李海浪)의 경우처럼 한문 이름일 수도 있으나 '해'처럼 따뜻하고 '나랑 너랑'처럼 친근한 여자 이름일 수도 있었다.

  그는 이름에서 한글이냐 한문이냐는 식의 이분법을 깨야한다는 글을 수없이 써왔고 강연도 많이 했다.

  91년 대학원을 졸업한 김슬옹처럼 많은 직업을 갖고 있는 경우도 드물다.

모교인 연세대를 비롯해 목원대 가천의대 등의 강사, 이름연구소 '일흠'의 으뜸일꾼, 푸른학교 시민연대 자문위원, 또물또 통합교육 연구회 회장 등.

  그러나 김슬옹의 수입은 직업수에 반비례해 왔다.

설흔을 몇년이나 넘기고도 결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아내를 맞게 된 것도 그 덕택이니 후회는 없다.

  그는 지금의 아내 윤양선에게 프로포즈할 때 그와 자신의 이름 글자들로 12행 시를 지어 보여 주었다.

몇분간 여자가 아무 말도 없어 틀린줄로 알았더니 "우리 신혼여행 어디로 가요?"하며 물었다.

  그의 많은 직업은 실속은 없어도 사회적 파장은 크다.

그 가운데 '한글누리'는 직접 이름을 지어 주는 것이 아니라 작명에 관심있는 이용자들에게 이름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여기에는 1만개의 음절이 수록돼 있어 이를 이용하면 25만개의 이름을 지을 수 있다.

  "박사과정을 마친 96년 후배들과 함께 개업했다가 지금은 독자적으로 운영하고 있어요.

물론 수입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러나 4년 전의 월 이용자 500명이 요즘은 5000명으로 늘어난 것을 보면 한국인의 이름이 머잖아 크게 달라질 판입니다.

여기에다 앞으로 활발해질 남북한의 교류도 이에 가세할 것입니다."

  그가 회장으로 있는 '또물또 통합교육 연구회'는 연세대 사회교육원 안에 있는 것으로 '또 묻고 또 묻는' 것을 권장하는 열린 교육운동이다.

  한글운동으로 시작된 그의 발길은 이제 독서클리닉운동으로까지 발전하고 있다.

자폐증에 걸린 어린아이들은 물론 노인들의 치매도 독서로 예방하거나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즘은 소리책의 제작에 부쩍 관심을 쏟고 있다.

소리책은 주로 맹인들을 위한 것으로 자선단체나 자원봉사자들만의 관심사였으나 이제는 운전자 등으로 대상을 넓혀 본격 출판물로 내놓는 것이다.

  그래선지 1시간 남짓의 인터뷰 시간이 계속 휴대전화의 벨소리 때문에 중단됐다.

  "어떤 점에서 저는 가장 21세기적인 문화인입니다.

뚜렷한 직장도 없고 고정된 수입원도 없으며 자신도 스스로의 직업을 뭐라 하기 힘들지만 '통합적 지식인으로 정보화 사회에 기여하고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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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평
세계일보 문화전문위원
세계일보 2000.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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