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8월 7일 칼럼니스트 COLUMNIST No.101
1999.09.19 창간 서울칼럼니스트모임 (Seoul Columnists Society) 주3~4회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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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잊으면 미래 없다

일본 대중문화가 거의 거침없이 들어오게 되고 일본과 더욱 가까워진다고 해서 우리와 일본 사이의 과거사를 묻을 수는 없다. 과거보다 현재와 미래가 중요하니 현재와 미래를 위해 과거를 잊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지만, 과거를 잊고 있거나 외면하려는 사람들에게 미래는 없으며, 현재 또한 굳건할 수 없다. 일본과 일본 문화를 대할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이것이다.

일본이 1945년 8월15일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이 날 우리나라는 35년간의 혹독무비한 피압박 상태에서 풀려났다. 유럽을 괴롭히던 나치 독일은 이보다 좀 이른 5월7일에 패망했다. 그에 앞서 1944년 6월6일 연합군은 노르망디 기습상륙을 감행하여 8월 25일에는 파리를 해방했다.

프랑스인들은 4년에 걸친 독일 점령치하에서 고초를 겪었다. 국민의 존경을 받던 패탱 원수가 괴뢰정부 수반이 되어 독일에 협력해야 했다. 점령된 프랑스는 유태인을 색출하여 죽음의 수용소로 내모는 일까지 거들어야 했다. 이런 와중에서 지하 저항단체들이 무력 항전을 계속하고 런던 망명정부의 드골 장군이 이끄는 자유프랑스군이 연합군 일원으로 참전해, 전쟁이 끝난 뒤 프랑스는 전승국으로서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다.

그렇듯 원수지간이던 프랑스와 독일이 이제 함께 두 기둥이 되어 유럽연합을 이끈다. 유럽연합 회원국 가운데 지난 날 독일에 괴롭힘을 당하지 않은 나라가 드물지만 독일과 함께 유럽합중국의 실현이라는 공동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독일이 통일되기 전 이야긴데, 서독 브란트 수상은 학살당한 유태인 묘지에 찾아가 무릎 끓고 눈물 흘리며 나치 독일의 죄악을 참회했다. 종전후 서독은 기회 있을 때마다 유태인 학살을 사과하고 경제적 지원 등 실질적 보상을 아끼지 않았으며 유럽 평화와 공영을 위해 노력했다. 이렇게 신뢰를 쌓아 독일은 유럽 통합 과업을 주도하는 위치에 섰다.

그렇다고, 독일 이웃들이 과거를 잊고 있거나 잊으려 하고 있지는 않다. 해마다 5월이 오면 유럽 여러 나라 텔레비전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과 나치에 관한 기록영화나 극영화가 방영된다. 신문과 잡지들도 참혹한 역사를 되돌아보는 특집들을 꾸민다. 독일에 항거하다 목숨을 바친 용사들을 기리는 행사가 곳곳서 치러진다. 나치 앞잡이 노릇을 했던 자들은 준엄하게 단죄되었다. 소수 도피자가 있지만 이들에 대한 시한 없는 추적은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다.

우리 애국지사들이 벌인 항일투쟁은 프랑스인의 저항활동보다 더 빛났으면 빛났지 못하지 않았건만, 광복된 나라의 집권자는 구국투사들을 홀대했다. 친일 부역자들에 대한 역사적 심판은 권력자의 방해로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역사 청산을 똑바로 하지 못한 우리한 테 일본이 입에 발린 사과나마 제대로 한 번 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사과도 받아낼 만한 당당한 자세가 되어 있어야 제대로 받아낸다. 자신이 엄정하지 못하고서 남에게 엄정하기를 바라기는 어렵다. 이제라도 친일행위의 실상을 샅샅이 밝혀가면, 우리는 좀더 바른 역사를 세울 것이고, 뒷날 제대로 된 교훈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만, 나라를 강탈하여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도 딴청부리는 일본이 우리를 더는 만만히 보지 못할 것이다.

우리 민족이 항상 약소했던 것은 아니며 우리 문화가 긍지를 지니지 못할 만큼 빈약했던 것도 아니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현재 우리 국력은 남들이 우습게 볼 만한 형편이 아니다. 7천만명이 쓰는 한국어 또한 작은 언어가 아니다. 제것에 어둡고 제것이 소중함을 모르면, 자긍심이 일기 어렵고 자기비하에 빠지기 쉽다. 국사와 국어를 충실히 가르치고 고유문화를 애써 보존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과거를 잊지 않고 교훈을 되새기는 민족에게, 그리고 긍지를 잃지 않는 민족에게, 미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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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강문(朴康文)

칼럼니스트

'새마을운동' 2000.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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