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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09.19 창간 서울칼럼니스트모임 (Seoul Columnists Society) 주3~4회 발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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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 보기 *칼럼,나도 쓴다 *방명록 *의견함 |
어느 입양아의 질문15년전 미국 가정에 입양된 애나 킴이 여름방학을 맞아 처음으로 한국을 찾 았다.핏줄은 다르지만 역시 한국에서 입양된 남동생 제이,그리고 양부모와 함께 왔다.뿌리를 찾는 마음으로 한 아동보호소를 방문한 이 가족은 큰 충격 을 받았다.그곳에 있는 아이들에게서 미국에 입양되기 전 자신의 모습을 본 애나 킴이 양부모에게 동생을 하나 더 입양해 달라고 말한 것이다.미국의 평 범한 중산층인 양부모가 더이상 아이들을 키울 여력이 없다고 대답하자 애나 킴은 울면서 소리쳤다. “한국인들은 왜 우리 같은 아이들을 입양하지 않느 냐”고. 애나 킴의 어머니 캐시 라일리로부터 이 말을 전해 듣고 한동안 할 말을 잃 었다.우리 아이들을 우리가 입양하지 않고 왜 외국으로 내 보내는가.그것은 한국인들의 혈통에 대해 강한 집착 때문이다.자신의 혈육이 아닌 경우엔 가 족으로 받아 들이지 못하는 것이다.더듬 더듬 대답하면서도 스스로 구차하고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애나 킴의 가슴 아픈 절규에 그 변명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보건복지부의 통계에 의하면 지난 1958년 이후 국내외에 입양된 아이들은 모두 19만9,000여명이고 그 중 해외입양아는 14만2,000여명에 이른다.전쟁 고아로 시작된 해외입양이 지금까지 계속 되고 있다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우리 잘못이다.해외입양아의 30% 정도만이 입양된 환경에 잘 적응하고 나머지는 한국인도 현지인도 아닌 상태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30%의 입양아 가운데는 국내에서라면 이룰 수 없었을 높은 성취를 이루 어낸 이들도 있다.그러나 그들에게도 자신이 부모와 조국으로부터 버림 받았 다는 마음 속 깊은 상처가 있음을 애나 킴의 경우는 일깨워 준다. 10년 전 미국에서 처음 만났을 때 애나 킴은 라일리 집안의 귀염둥이었다. 엔지니어인 아버지,교사인 어머니는 물론이고 고모와 할머니,할아버지에게까 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아이”였다.사랑을 듬뿍 받아 구김살 없이 자 란 애나 킴은 이제 축구를 즐기며 매사에 적극적인 ‘미국 아이’가 돼 있었 다.그런데도 그가 한국에 와서 가장 좋아 한 점은 아무도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 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점에 대해 어머니 캐시는 딸이 아름답고 매력적인 탓에 세계 각국 사람들 이 모인 크루즈 여행에서도 젊은 남성들의 눈길이 쏟아졌다고 주장했지만 정 작 애나 킴 자신은 “같은 피부색에 같은 눈빛과 같은 머리색깔을 지닌 사람 들 사이에 있는 것이 너무 편안하다”고 말했다. 우리 아이들이 우리 가정에서 정체성의 위기 없이 자라도록 할 수 없을까. 아무리 기회가 보장된 풍요로운 곳에서 양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는다 해도 내 나라에 비할 바는 아닌 것이다. 다행히 최근 몇년 사이 국내입양이 해외입양의 3분의 2 정도에 이를 정도로 늘어났다지만 아직은 미미한 숫자다.물론 말이 쉽지 남의 아이를 내 아이로 키우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그러나 이런 생각에서 벗어 나지 않는 한 얼굴에 모닥불을 끼얹는 곤혹스러운 질문에서 우리는 벗어날 수 없다. 방학이면 많은 해외입양아가 한국을 찾는다.한국을 떠나기 전 그들을 격려 하기 위해 이희호 여사가 청와대에서 마련한 ‘재미 입양아 격려 다과회’에 참석한 애나 킴의 가족은 자랑스러움으로 얼굴을 빛냈다.“여러분 뒤에는 늘 여러분과 함께 하는 조국이 있습니다.어려서 떠난 조국에 섭섭함이 있더라도 모국을 잊지 마시고 기억해 주시길 바랍니다.모국도 여러분들을 잊지않고 한 결같은 부모의 마음으로 반갑게 맞을 것입니다”는 내용의 인사말에 자부심 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렇다.국내 입양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함께 해외입양아에 대한 보속을 우 리는 해야 한다.그 보속은 물질이 아닌 정신적인 연대와 감사다.그런 연대 위에서 입양아 출신 해외 동포들이 국제화 시대 제3의 섹터로 세계무대에서 활동하기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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