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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7월 19일 칼럼니스트 COLUMNIST 제93호
1999.09.19 창간 서울칼럼니스트모임 (Seoul Columnists Society) 주3~4회 발행
http://columnist.org
*지난호 보기 *칼럼,나도 쓴다 *방명록 *의견함
네티즌의 힘과 예절

“업무를 수행하면서 기자 못지않게 신경 쓰이는 사람들이 네티즌입니다.아니 기자들보다 더 눈치를 보게 됩니다” 어느 부처의 현직 장관이 자신의 경험을 통해 느낀 네티즌의 힘을 이같이 표현했다.정부의 정책수립이나 이행과정이 언론을 거쳐 독자와 시청자,즉 국민에게 전달되고 거기에서 형성된 여론이 대부분 다시 언론을 매개 삼아 반영되는 지금까지의 경로에 큰 변화가 온 것이다.네티즌들이 언론을 통하지 않고 바로 해당 부처의 홈페이지 또는 장관에게 E메일을 보내 자신들의 견해와 찬반 입장 등을 당당히 밝히기 때문이다.이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언론 매체를 통해 가늠하던 것보다 더욱 생생하게 여론의 향배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에요.업무를 떠난 사생활도 네티즌들의 촉수에 어김없이 포착돼 바로 E메일이 날아들어요.그럴 때는 상당히 부담스러워요.사생활까지 이처럼 만천하에 드러나면 지은 죄도 없이 괜히 심리적으로 위축되거든요. 따라서 앞으로 공무원 지망자가 많이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공사간에 일거수 일투족이 그렇게 드러나면 마음이 편할 수 없잖아요” 그러면서 술 한잔을 하더라도 디지털 아닌 아날로그형 술집으로 가야 좀 편할 것이라고 농담했다.

공무원들은 불편하겠지만 이는 디지털 사회의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현상이라 하겠다.네티즌들이 항시 주시하면서 의견을 즉각 제시하는 체제가 굳어지면 공무수행의 투명성이 높아지고 비리도 자연히 줄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4·13총선 때 부적격자 낙선운동,소위 386세대 국회의원들의 5·18 음주 물의 등에서 사람들은 인터넷의 막강한 힘을 보았다.바꿔 말하면 네티즌들의 여론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피부로 느끼게 해 준 것이다.

최근 모 언론사 기자가 서울 남대문경찰서에서 술에 취해 저지른 행위가 일반 신문·방송에는 두드러지게 취급되지 않았다.그러나 사이버 공간에서는 인터넷신문 ‘오 마이 뉴스’를 중심으로 전국이 약 2주 동안 들끓다가 경찰당국과 해당 언론사의 후속조치로 일단 매듭지었다.이 역시 인터넷의 힘을 절감케 한 사례였다.

이처럼 네티즌들 앞에서는 어떤 문제도 쉬쉬하며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누구든지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조심하도록 하는 장치가 마련된 것이다.이것을 더욱 다듬고 튼튼하게 보완하면 새로운 풍토 조성과 맑고 밝은 사회 건설에 크게 이바지할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긍정적 측면 못지않게 부정적인 면 또한 적지 않아 우려되는 바가 많다.가장 대표적인 것이 네티즌의 예의실종 현상이다.상대방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익명성을 악용,말로 다 할 수 없는 욕설과 비방을 퍼붓는 네티즌이 너무 많다.이는 네티즌의 힘을 낭비하고 무력화하는 멍청한 짓이요,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해치는 또 다른 폭력이 아닐 수 없다.

정부 또는 어느 기관에서 하는 일이 마땅치 않거나 자신의 생각과 다르면 왜 그런지 조리 있게 설명하고 건설적 대안을 제시하거나, 예의를 갖춰 잘못을 지적하면 이를 고맙게 받아들이지 않을 리 없다.부당한 점이 있으면 논리적으로 반론을 펴면 된다.

하지만 편지 제목부터 상스러운 욕설로 시작한 이가 허다하다.이는 어떤 문제를 차근차근 해결하자는 것이 아니라 비난을 위한 비난이요,욕설을 통해 말초적 쾌감을 즐기는 저질행위에 불과하다.그러면서 비겁하게 자신은 밝히지 않고 가명을 쓴다.

그로 인해 일시적 저질 쾌감을 얻을지 모르지만 그 부작용은 결국 자신에게도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인터넷의 정당한 힘이 아니라 못된 폐단만 키우는 것이다.근거없는 사실을 조작하여 남을 욕하고 괴롭히면 사이버공간은 결국 현실과 다를 바 없는 불신,비리,갈등,모순이 횡행하는 세상이 되고 만다.

도시화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서로가 누군지 모르는 익명성이다.이 때문에 남을 두려워하지 않는 범죄와 이기주의가 만연,우리는 지난 40여년간 인간미가 실종된 험악한 세상을 살아왔다.이것도 모자라 이제는 인터넷 상에서까지 익명성을 악용한 폭력이 난무한다면 정의,자유,평등,민주주의 등 우리가 지향하고 지켜야 할 가치들은 영영 구현될 수 없다.

할 말이 있고 밝히고 싶은 입장이 있으면 떳떳하게 실명으로 설명하도록 하자.정부도 다른 나라들과 협력하여 네티즌 실명제를 추진해야 할 것이다.시급히 서두르지 않으면 네티즌의 힘은 폭력으로 변질되고,디지털 사회의 이상보다는 악몽이 더 빨리 현실로 나타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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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호

국민일보 논설위원
국민일보 2000.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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