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6월 12일 칼럼니스트 COLUMNIST 제81호
1999.09.19 창간 서울칼럼니스트모임 (Seoul Columnists Society) 주3~4회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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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묘지에서도 휴식을
가끔 묘지에서도 휴식을

무덤이 좋고 죽은 이들이 편해서 묘지를 즐겨 찾는 친구가 있다.직업이 장의사거나 묘지관리인이 아니냐고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천만의 말씀 그는 현직 경찰 간부다.서울의 용미리,망우리,그가 근무한 적이 있는 지방의 각종 공동묘지는 물론 산천 곳곳에 있는 무덤들은 그에게 언제나 훌륭한 쉼터요,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활력소가 되고 있다.화장한 이들의 유골가루가 날리는 곳도 그는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낯선 곳으로 발령났을 때도 그는 가능하면 빨리 그곳의 공원묘지나 가까운 무덤을 찾았다.모든 것이 익숙지 않고 힘들 때 묘지 나들이는 큰 힘이 되어 주기 때문이다.

약 30년전 군대를 마치고 다시 학교에 돌아온 우리는 참혹한 경제적 어려움 등 여러 가지 고통을 견디다 못해 어느 날 무작정 시내버스를 탔다.구파발과 삼송리 어름의 종점에서 소주와 오징어를 사들고 찾아간 곳이 ‘전설 따라 삼천리’에서나 나올 법한 으슥하고 외진 고갯마루로 인적이 매우 드물었다.어느 무덤 앞에 자리 잡은 우리는 마음속으로 망자에게 양해를 구한 뒤 어두워질 때까지 피곤한 심신을 달랜 적이 있다.

그리고 그만이었는데 그는 이미 당시부터 묘지 휴식의 묘미를 터득한 모양이었다.그게 지금까지 그를 지탱해준 커다란 의지가 된 것이다.고단하고 팍팍한 삶을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좌절과 절망을 예사로 겪는다.그럴 때 대부분 일터 밖의 바다,산,한적한 시골로 가서 스트레스를 풀거나,가까운 사람을 만나 술 한잔을 기울이며 새로 힘을 얻지만 그는 주로 묘지로 가는 것이다.

젊은 날의 객기도 아니고 사위스럽고 음습하게 무슨 묘지냐고 힐난하니 아직도 철이 덜 들었느냐는 투로 대답했다.유령,공포,시체 등을 떠올리는 것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의 문제이지 다른 시각에서 보면 그토록 사람의 심사를 차분하게 해주는 곳이 없다는 것이다.

“일터에서 또는 주변 사람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우리는 분노,실망,욕심 등 갖가지 때문에 쉽게 상처를 받는다.죽은 자와 묘지는 그런 이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궁금하면 직접 가 보라.묘지만큼 순수한 곳을 발견하기 어렵다.어느 종교시설이나 휴양지,어떤 친구 못지않게 편하게 해 줄 것이다.묘지에서 휴식을 취하는 방법은 일정하지 않다.자기 식대로 하면 된다”

그는 각 무덤 앞의 묘비명을 가능하면 빼지 않고 꼼꼼히 읽는다.거기에는 죽은 이의 일생이 드러나 있거나 영원한 이별을 애통해하는 유족들의 간절한 마음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제한된 범위 내에서 가능하면 많이 기록하려 했으므로 한 마디 한 마디에 절절함이 스며 있다.그것들을 통해 죽은 이의 일생을 더듬어보고 가늠해 보노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는 것이다.

살아 생전 높고 귀하게 살다 간 사람,미뤄둔 꿈이 너무 커 아쉬움이 한없는 사람,너무 불행하고 원통한 삶을 살다 간 사람 등 갖가지 사연을 읽다 보면 자신 속의 욕심,분노,속상함,증오 등이 어느 사이에 사라짐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초라해진 무덤,삐져 나온 유골들을 보면 안타까움에 앞서 허망함도 깨달으며… 그렇게 묘지를 돌아다니면 죽음과 삶의 경계마저도 잊는다.

현실 속에서 바등거리는 자신의 모습,남들과 부딪치고 깨지며 생기는 미움과 저주도 언젠가는 저렇듯 한 줌 흙이려니 생각하면 대단한 도사나 되는 듯해 실없는 웃음도 나온다고 한다.그래도 묘지에서 그렇게 휴식을 취하고 나면 마음이 개운하기 이를데 없다는 것이다.직장과 가정은 물론 다른 곳에서 만나는 사람들까지도 따뜻하게 대할 수 있는 여유가 자기도 모르게 생겨 스스로 놀라기도 한다.

그는 틈이 나면 함께 가자고 권했다.생각하기에는 혼자가 더 나을 것 같다고 하니 동행이 없으면 삶과 죽음에 너무 깊이 빠지므로 약간의 제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시간은 해가 많이 기운 늦은 오후가 제격이라고 했다.생기 발랄한 아침과 묘지는 어울리지 않으니 그 말이 적절한것 같다.

고통의 바다라고 하는 인생.그걸 건너는데 필요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묘지 휴식을 의지로 삼는 그의 방법도 상당히 괜찮을 듯하다.누구나 피할 수 없는 죽음인데도 아닌 것처럼 살아가는 우리들이 부질없고 허망한 일에 얼마나 자주 붙잡히는가를 가르쳐 줄 것이다.나아가 많은 위로도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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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호
국민일보 논설위원
국민일보 2000.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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