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655 [칼럼니스트] 2018년 2월 13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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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보수紙- 문재인의 訪中 보도를 보고
양평 梁平   (서울칼럼니스트모임 회원)
http://columnist.org/yangpy


-2017.12.25 작성

최근 문재인의 중국 방문 성과를 두고는 여러 가지 말들이 엇갈리고 있다. 그것을 정리할 능력은 없다. 다만 내 눈에는 한 가지 뚜렷한 ‘성과’가 있다. 문재인이 추구했던 목표와는 한참 거리가 있지만 보수신문 자신들의 아이덴티티를 찾게 해준 점이다.

보수신문들의 아이덴티티가 뭐냐고? 그것도 어려운 질문이지만 쉽게 말하면 이명박을 마치 하늘로부터 도깨비 방망이라도 받은 듯한 ‘경제대통령’으로 치켜세워 대통령을 만든 체질과 솜씨다. 그리고 박근혜의 한계를 빤히 알면서도 “나라와 결혼한” 독신이라며 장 다르크나 스페인 무적함대를 물리친 엘리자베스 1세 같은 지도자로 치켜올려 청와대에 골인시킨 취향과 술수다.

그럼 그들이 아이덴티티를 잃은 적이 있는가? 그들의 깊은 뜻은 헤아리기 어렵지만 지난 촛불집회가 한창일 때 진보신문보다 더 과격하게 박근혜와 최순실을 공박한 것이 나의 평면적인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리고 보수신문들에게 대목인 대선에서도 특유의 포화가 화력이 떨어진데다 표적도 못 찾은 듯 산발적으로 오발탄 같은 것이나 쏜 것도 그들 특유의 정체성을 잃을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들이 문재인의 중국 방문 직전까지 줄곧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대선 국면에서도 반기문이 귀국해 지지율이 치솟자 잽싸게 화력을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래도 박근혜의 탄핵과 구속, 그리고 대선 패배로 찌그러든 보수 세력의 위상을 말해주듯 보수지들은 그동안 표적도 제대로 잡지 못한 모양새였다. 그러던 보수지들이 문재인의 중국 방문을 계기로 거듭나듯 낯익은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문재인의 중국 방문이 사드라는 어려운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저자세 외교의 모습을 보인데다 한국 기자들의 폭행 피해까지 당하자 마치 그동안의 ‘침묵’이랄까 ‘부진’을 만회하려는 듯 융단폭격의 필봉을 휘두른 것이다. 그런 보도의 분위기에서는 한국의 그런 저자세 외교를 즐기는 듯한 느낌까지 들었다. 문제는 보수지들의 그런 비판이 한국 자체의 상황에 대한 판단이 없거나 이를 외면하고 있는 점이다.

이번 방중이 저자세 외교로 비친 것은 상당부분 한국의 지정학적인 숙명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자학적인 말이지만 한국은 역사적으로 ‘극동의 수인(囚人)’이라는 말도 있었다. 강대국들에 둘러싸여 수난을 당하는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오래 전에는 한나라와 당나라의 침략을 받은 것이 우선 그렇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어서 임진왜란을 당했고 그 뒤에는 청일전쟁의 무대가 됐다가 일본에 먹혔다. 여기에다 기마민족인 몽고족의 침략도 그렇지만 한족과 기마민족 사이에 끼어 당한 병자호란은 너무 비극적이었다.

20세기에 들어서자 미국과 소련이라는 새로운 강자가 등장해 한국을 쪼갰고 끝내 동족상잔의 비극을 맞기도 했다. 그것도 한국의 지정학적 요인이 결정적이었다. 그래도 그 뒤의 냉전시대는 평온한 편이었다. 우리는 미국에 작전권을 통째로 맡긴 채 나름대로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그래서 “차라리 겨울은 우리를 따뜻하게 했다”고 하는 것일까. 그러나 냉전의 얼음이 녹아 중국의 문호가 우리에게 열리자 한국의 수인 생활은 더 복잡하고 어렵게 됐다.

우리는 군사적으로는 미국에 붙들린 채 경제적으로는 중국에 붙들린 모습이다. 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에서 대중국 수출이 25%를 넘어 4분의 1이상을 차지하면서 대미 수출의 2배를 상회하게 됐으니 중국에 붙들려 있다는 표현이 지나친 것은 아니지 않는가. 최근 사드로 인해 관광객이 줄었다는 등의 아우성이 이를 말해준다. 그런 것은 중국이 사드로 뒤틀린 심사를 제대로 보복했다기보다는 그 준비 동작 같은 것에 불과한데도 한국은 벌써 난리가 났다.

한마디로 사드를 둘러싼 한국의 처지는 극동의 수인 치고도 가장 참담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솔로몬 재판에서 두 여인 사이에 놓인 아기의 모습이다. 솔로몬 재판의 경우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어느 여인도 진짜 어머니가 아닌데다 솔로몬 같은 명판관도 없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들은 필요하다면 서슴없이 그 아기를 서로 잡아당길 수도 있는 일이다.

보수지 보도의 또 한 가지 문제는 뻔한 사실관계도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박근혜 정부가 지난해 ‘시원시원하게’ 그리고 ‘통 크게’ 사드 배치를 수락했을 때 그로 인해 뻔히 닥치게 될 부작용을 몰랐는지 외면했는지 별로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러다 정권이 바뀌고 중국의 ‘만만디’한 반응이 나오기 시작하자 보수지는 시침을 딱 떼고 비난일색이었다. 중국의 그런 반응은 삼척동자라도 예상할만한 일이 아니었던가.

보수지들의 현학적이고도 수려한 비판의 글들을 읽으면서 한국에는 출중한 외교전문가들이 너무 많다는 느낌이었다. 모두들 가볍게 사드 문제를 해결할 듯이 유려한 필봉을 휘둘렀다. 그러나 과연 그들에게 정책을 맡겼을 때 제대로 처리할 수 있을까 하는 데 생각이 미치면 쓴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런 정경을 대하다 보니 20년 전 IMF상황에서 진보정권이 처음 집권했던 일이 생각났다. 만일 당시 김영삼 정권이 한보 사태 등으로 탄핵을 받아 김대중 정권이 반년쯤 일찍 들어섰다가 IMF사태를 맞았다면 어찌됐을까 하는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아마 보수정당과 보수언론이 합창을 하듯 새 정권을 비난하고 그 기세에 압도된 국민들은 긴가민가하고 눈만 껌벅이지 않았을까. 물론 보수지의 기사를 열심히 읽은 국민들은 선봉에 서서 반정부 운동을 벌이고… 요즘의 정황은 그런 가정이 현실화된 느낌이다. 사드를 그처럼 시원스레 들여온 새누리당의 후신인 한국당은 그로 인한 자책감은커녕 즐기듯이 침방울을 튀기면서 정권을 비난하고 보수지들은 거리낌 없이 맞장구를 쳐주고 있다. 그것은 한국인들의 한계라고 말할 수도 있다. 언론의 수준은 곧 국민의 수준이라고들 하지 않는가.

어찌 보면 그것은 한국인들 가운데 그래도 깨어 있다는 촛불 시민들의 한계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의 눈에는 성공적이라는 지난해의 촛불 시위에서 이미 하나의 허점 같은 것이 비쳤다. 그들은 박근혜와 최순실 그리고 새누리당을 격렬하게 비난하면서도 왜 그런 ‘이상한 여자’를 대통령에 당선시키는 데 1등 공신의 역할을 한 보수신문들의 책임은 묻지 않았을까?

그들은 광화문에서 여의도의 새누리당 당사까지 찾아가 보수당을 성토하면서도 촛불집회의 현장 부근에 밀집되다시피 한 보수언론에는 눈길도 돌리지 않았다. 그걸 보니 바로 4.19혁명의 현장이던 광화문의 시위대가 서울신문을 불태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촛불시민들이 보수신문에 그런 류의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던 것이 아쉬웠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아니 우리 보수지들은 4.19 당시의 서울신문처럼 우매하지 않아서 ‘진화’하기도 했다. 서울신문은 바로 전날 고대의 시위를 특유의 유치한 왜곡보도로 태평로에 집결한 시위대들의 매를 번 셈이었다. 그러나 2016년의 보수지들은 진보지보다 앞장서 정권을 비판했고 그 앞에서 백만대군을 자랑하는 촛불시위대는 기억력이 나쁜 공룡처럼 굴었다. 그들에게는 보수신문의 존재 자체가 눈에 띠지 않았고 더러는 보수지들의 통렬한 박근혜 비판에 갈채를 보내기도 했다. 아마 그들 가운데는 보수지들의 ‘개과천선’이라는 터무니없는 단어를 머릿속에 굴린 이들도 있었으리라. 그래서 한국의 보수지는 영원하다.

일제하에서는 황국신문으로 충실하다가도 해방되어 ‘대한독립만세!’만 부르자 간단히 ‘민족지’로 신분변경이 됐다. 우리 국민들은 당시 ‘민족지’라는 그 이상한 단어가 무슨 뜻인지 물어볼 경황도 없었다. 과문의 소치인지는 몰라도 나는 우리나라 밖에서 ‘민족지’라는 단어를 접한 기억이 없다. 아마 많은 국민들도 그럴 것이다.

‘민족지’라면 ‘사보(社報)’나 ‘당보(黨報)’의 연장선상에서 민족이 경영하는 신문이란 말인가. 그것은 물론 아니다. 그것이 아니면 그 신문을 경영하는 사람들이 우리 민족이어서 나온 말인가? 그러면 다른 신문들도 모두 민족지라고 해야 할 것 아닌가.

그렇다면 그 민족지란 ‘민족주의적 신문’을 지칭한 것인가? 그것도 이상하다. 그들이 만일 그렇다고 답하면 일제의 침략을 미화한 그들의 지난날 논조를 들어 ‘일본민족지’인가 ‘한국민족지’인가를 확인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럴 수준이 아닌데다 ‘민족’이라면 감격부터 하는 우리 민족의 체질 속에서 그들은 별로 고통 없이 ‘민족지’로 거듭날 수 있었다.

보수지들은 그 뒤에도 군사독재에 충성하여 6.10사태 당시에는 시위대들을 모질게 비난했다. 그러나 6.29선언이 발표되자 갑자기 “오늘 기쁜날!”이라는 글로 간단히 문민정부 시대 주류 언론의 자격을 받을 수 있었다.

촛불 시위 국면에서 박근혜를 비판한 것도 그렇다. 촛불 시위대는 보수지들의 박근혜 비판에 환호하기에 앞서 그쪽에 적어도 한 가지는 물었어야 한다. 그 신문들이 이명박과 박근혜를 떠받들어 대통령을 만든 데 대해 어찌 생각하느냐는 질문이다.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인정하면 사과도 요구했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나라 국민에게는 무리한 주문인 셈이다. 그래서 우리 보수지들은 안녕하다.

그러고 보면 ‘반인반신’의 독재자도 사라져 간 이 나라에서 ‘최장기 집권’한 것은 임기도 없는 ‘밤의 대통령’인 셈이다. 말이 ‘대통령’이지 세습되는 것이니 ‘밤의 제왕’이라 해야 할 것이다. 우리 국민이 그런 밤의 제왕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날은 언제나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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