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651 [칼럼니스트] 2017년 12월 7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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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땡’을 잡은 두 사람- 張學良과 전두환
양평 梁平   (서울칼럼니스트모임 회원)
http://columnist.org/yangpy


12월에 들어서면 나는 왜 화투가 장땡(10땡)으로 끝나고 12땡이 없을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12월12일이 우연히 달과 날의 순서가 같은 날이 아니라 ‘12.12’라는 특별한 날이 되면서부터다.

잘 알려진 대로 1979년 이날 전두환 소장은 별이 두 개나 더 많은 정승화 대장을 잡은’ 날이다. 요즘은 별 넷도 흔하지만 그 대장은 계엄사령관을 겸한 참모총장이었다.

그래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로부터 43년 전인 1936년 그날엔 중국의 동북군 군벌 장쉐량(張學良)이 난징(南京)의 국민당 정부 주석인 장제스(蔣介石)를 잡는 시안(西安)사변이 일어난 날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날은 좋게 보면 12땡의 길운을 만나는 날이고 나쁘게 보면 하극상이라는 액운을 당할 수도 있는 날인가부다.

좋은 면으로만 보면 장제스를 잡은 중국의 12땡이 더 커 보인다. 그러나 실속으로 보면 한국의 12땡이 더 큰 셈이었다.

전두환이 정승화를 잡은 것은 대권의 옥새를 거머쥔 셈이어서 그는 8년 가까이 권좌에 앉았다. 나온 뒤에는 수천억 원의 거금을 부정축재 한 혐의로 옥살이도 했지만 그가 불법으로 차지한 재물을 다 토해 냈다고 보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반면 장쉐량은 장제스라는 엄청난 대어를 낚았으나 자신을 위해 챙긴 것은 없었다. 그는 장제스에게 홍군에게만 향하고 있는 총부리를 일본군에게 돌리도록 강요했다. 그것이 관철되자 장쉐량은 장제스를 따라 난징에 가서 감옥살이와 뒤이은 자택연금 등으로 54년을 살았을 뿐이다.

54년-. 37세의 사나이가 철들어 살았던 세월의 두 배를 갇혀 지냈으니 그것은 땡이 아니라 죽음보다 못한 액운을 만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국민들이 보는 그날의 운수풀이는 정반대다.

많은 중국인들, 특히 지식인들에게 12월12일은 건군절(建軍節,8월1일)이나 국경절(건국기념일,10월1일)에 버금할 만큼 의미 있는 날로 각인돼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당시 중국의 실정이었다. 일본의 침략이 날로 심각해지고 있음에도 “우선 홍군을 평정한 다음 일본군을 내 쫓는다”는 ‘안내양외(安內攘外)’만 염불처럼 되뇌는 장제스를 보는 국민들의 심경은 폭발 전이었었다.

그러면 12월12일을 보는 한국인들의 감회는 어떨까. 그 답은 홍준표가 한 셈이다. 최근 한국당은 당사에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 등 보수적인 전직대통령 사진들을 걸었다. 따라서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 등 4명의 사진은 저절로 빠졌으며 그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전두환 사진의 빈자리다. 한국당에게 이승만은 아주 먼 친척이고 박정희가 방계 친척이라면 전두환은 아예 시조 격인데도 빠져서다.

호적상 한국당의 원류는 박정희의 공화당이 아니다. 그 공화당은 10.26으로 와해됐고 전두환이 그 잔류세력에다 엉뚱하게도 진보당 출신의 윤길중 같은 인사들까지 뒤섞어 만든 민주정의당이 그 본류다.

그 당이 김영삼 등과 3당 합당을 하면서 민주자유당이 됐지만 민주정의당의 본질이 달라진 것은 없어보였다. 김영삼의 행마가 ‘삼당야합’으로 불리는 등 변절로 비치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따라서 한국당 ‘시조’의 사진이 당사에서 쫓겨난 데는 12.12를 보는 한국인의 시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5.16과 12.12는 모두 쿠데타이면서도 ‘혁명’이나 ‘구국의 결단’으로 포장됐으나 12.12가 5.16보다 초라하게 비치는 것은 두 주인공의 역량 차이일까. 아니면 그 사이에 국민들이 철이 들어 쿠데타와 혁명을 구분하는 안목이 생겨서일까.

어찌 보면 12.12나 시안사변이나 그 사변 뒤 두 주인공의 행적이 그 사건의 모양새를 결정했다고도 할 수 있다.

전두환이 퇴직 후 부정축재 한 돈을 내놓지 않겠다며 자신의 재산이 29만원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 거짓말은 한국판 12땡의 품격을 결정적으로 망가뜨렸다. 그는 ‘구국의 결단’의 주인공과는 아예 거리가 먼 채 배 째라는 사기꾼, 그것도 지능이 떨어진 파렴치범으로 전락한 모습이었다.

반면 거사에 성공하자 장제스를 따라 ‘사지’에 간 장쉐량은 얼핏 일본의 ‘주신구라(忠臣蔵)에 나오는 47인의 사무라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들은 거사에 성공했고 그 성공은 타살당하지 않은 채 ’할복자살할 기회‘를 보장한 정도였다.

당시 장제스가 장쉐량을 죽이지 않아 그가 엉뚱하게도 103세의 장수를 누렸다 해서 그의 난징 행을 가볍게 볼 수는 없다. 시안사변 당시 서북군 총사령관으로 장쉐량과 함께 거사했던 양후청(楊虎城)이 장제스에게 죽음을 당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실은 장제스가 시안사변 직후에는 양후청도 살해하지 않아 그는 외국으로 나갔으나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귀국한 것이 화근이었다. 장제스는 1949년 9월 양후청을 죽인다. 장제스가 양후청을 살려두었다가 대륙에서 쫓겨나기 직전에 양후청을 살해한 동기는 알 수 없으나 짐작은 간다. 그에게 시안사변은 마오쩌둥과의 오랜 씨름에서 결정적인 유탄을 맞은 한스러운 사건으로 비치지 않았을까.

대국적으로 보면 장쉐량에게 12.12는 행운의 땡을 잡은 날이다. 만주의 마적 두목 출신 군벌인 장쭤린(張作霖)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이 사건으로 ’변신‘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장쭤린이나 장쉐량이나 항일투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장쭤린은 만주에 진출한 일본군의 비위를 맞추느라고 우리 독립군에게 가혹한 짓도 서슴지 않았다. 장쉐량은 젊은 시절 잘생긴 얼굴의 공자 행세로 엽색행각은 물론 아편까지 손댔다. 아버지가 일본군에 죽었어도 일본군에 적극 항전하기는커녕 만주사변 등에서 계속 물러나기만 했다. 그랬던 장쉐량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동포들에게 다가간 것이다.

그가 잃은 것은 군벌의 유산 정도였으나 그것은 어차피 그의 손을 떠나야할 것들이었다. 군벌시대를 장식했던 돤치루이(段祺瑞)나 우페이푸(吳佩孚)등 모든 거물 군벌들이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에는 견디지 못한 채 소리 없이 사라져갔지 않았던가. 그래서 시안사변이라는 격동을 겪은 그가 장수를 누린 것이 새삼 가상하게 느껴진다.

201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