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634 [칼럼니스트] 2017년 6월 20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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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말 - 그 이상한 뒤안길(04):
'보리고개를 없앤 사람'- 半人半神 신화의 기원

양평 梁平   (서울칼럼니스트모임 회원)
http://columnist.org/yangpy


‘보리고개를 없앤 사람’이라는 말은 이상할 것이 없는 말이다. 그것이 누구를 지칭하는 말인지도 명확하다.

굳이 시비꺼리를 찾자면 맨 끝의 ‘사람’이라는 말 정도다. 그 주인공이 바로 ‘반인반신’인 박정희여서다.

요즘 그의 ‘100주년 탄신제’라 해서 기념우표를 발행한다는 등 열을 올리고 있는 이들의 눈에는 특히 그렇다. 성인이나 임금이 태어난 것을 기념하는 탄신제의 주인공을 ‘사람’이라고 묘사한 것이 얼마나 불경한 일인가.

하지만 그런 것을 떠나서도 이 말을 곰씹어보면 수긍할 수 없는 대목들이 너무 많다.

나는 보리고개를 없앤 사람이라는 말을 들으면 우선 “왜 ‘천연두를 없앤 사람’이라는 말은 없을까?”하는 의문이 떠오른다.

지난날 우리 역사에서 보리 고개도 무서웠지만 천연두도 그에 못지않았던 것이다.

보리 고개를 넘어가지 못해 죽은 이들과 ‘손님’으로 찾아온 '마마'가 저세상으로 데려간 사람은 어느 쪽이 더 많을까?

그건 알 길이 없으나 “호랑이나 오랑캐보다 무섭다”던 천연두는 지난날 무서움의 대명사였다.

천연두가 무서웠던 것은 우리나라만의 일도 아니다. 신대륙 발견 이래 남미의 원주민들이 급감한 것도 백인들의 총알보다 무서운 천연두 때문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천연두는 보리 고개처럼 하층민에게만 두려운 것도 아니었다. 청나라의 첫 황제인 순치제(順治帝)도 천연두로 일찍 죽었다.

그래서 순치제의 생모인 효장(孝莊)태후가 비슷한 또래의 손자들 가운데 이미 천연두에 걸렸다가 살아남은 현엽(玄燁)을 점찍어 강희제로 등극시켰다. 따라서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군은 아마도 ‘곰보’였을 가능성이 많다.

하지만 천연두가 극심하던 그 시절에는 마마자국이 오히려 자랑이 되기도 했으니 서양에서 결투가 심하던 시절 얼굴의 흉터 같은 셈이다.

그렇게 무서운 천연두였으나 어느덧 마마자국의 얼굴들이 사라지더니 아예 세계의 질병 족보에서도 사라졌다.

그러나 ‘천연두를 없앤 사람’이라는 반인반신은 없다.

그것은 천연두를 없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다. 1796년 우두를 발명한 영국 의사 에드워드 제너가 천연두에 처음 칼을 휘둘렀으나 그것은 고래의 몸에 창을 하나 꽂은 정도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그로부터 한 세기쯤 지나 지석영(池錫永)이 종두법을 도입한 것도 한국의 천연두라는 고래에 창을 하나 꽂은 셈이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훨씬 지난 뒤에 태어난 나의 눈에도 많은 ‘곰보’들이 비쳤다.

한마디로 제너나 지석영 같은 위인들을 따라서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천연두는 사라진 것이다.

굳이 보리 고개를 없앤 사람의 논리를 따르자면 고종으로부터 시작해 일본 총독들을 거쳐 이승만까지 이어지는 위정자들을 나열해야 할 판이다.

천연두와 달리 보리 고개는 어느 영웅적 지도자의 영도력만으로 없어질 수 있는 것일까.

그럴 수는 없다. 보리 고개도 보이지 않는 무수한 사람들의 기술과 노력으로 사라진 것이다.

예를 들어 보리 고개를 없애려면 하늘의 처분만 바라는 천수답(天水畓)에 저수지의 물을 대주어야 하니 저수지 건설부터 시작해야 한다. 거기엔 동양에서는 사용하지 않았던 시멘트를 이용한 토목공사 기술을 오래 연마해온 서양 기술자들의 노력이 잠재해 있다.

따라서 제너의 의술처럼 서양의 토목공사 기술을 익힌 우리 기술자들의 없이는 보리 고개가 낮아질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농업상의 기술을 떠나 보리 고개를 없애는 데 크게 기여한 우리 공업기술도 그렇다. 그것은 박정희와 무관하게 이어온 한국인 특유의 학구열이 이룩한 것이다.

1950년대만 해도 대학들은 우골탑(牛骨塔)이라는 비웃음을 받지 않았던가. 여기엔 시골서 소를 팔아 대학을 보내봤자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절망감이 깔려 있었다.

예를 들면 한 고을에 공장이라고는 고작 연탄 공장이나 성냥 공장 정도밖에 없던 시절에 공과대학을 나오면 무슨 소용이냐는 식이었다.

은행들이 1년에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행원만 모집하고 무역회사 같은 것은 거의 없는 처지에 상과대학을 나와도 뾰족한 수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맞은 1960년대는 한국의 경우 쿠데타가 일어난 불운의 시기였으나 동아시아 경제를 위해서는 행운의 시기였다.

일본이 2차 대전의 패배로부터 15년이 지나 기지개를 켠데다 마침 베트남 전쟁이라는 호기를 맞아 경제가 도약기에 접어들었다. 그 호기는 그들이 좋아하건 싫어하건 이웃나라들이 동참하게 마련이었고 동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학력수준을 자랑하는 한국과 타이완이 가장 큰 혜택을 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골탑이라는 말을 들어가며 허리띠를 졸라맨 채 자녀들을 대학에 보낸 촌부들이야 말로 산업의 역군들을 길러낸 주역들인 셈이다.

역사를 통해 갑질의 횡포를 가장 많아 겪었기에 밟혀 죽지 않기 위해서 기를 쓰고 공부를 시켰던 두 나라의 그 어두웠던 역사가 의외로 빛을 보았다고도 할 수 있다.

다행이었던 것은 한국이나 타이완과 마찬가지로 학력수준이 높은데다 천문학적 규모의 노동자 군단을 거느린 중국이 아직 개방되지 않은 점이었다.

따라서 한국의 60-70년대의 경제성장을 주도한 것은 부패한 구한말의 위정자들에서 자유당 통치자들까지도 모두 한 축에 끼어야 할 일이었다.

‘보리 고개’의 신화에 내포된 또 하나의 허점은 바로 똑 같은 기아를 경험한 인접국들의 경우를 살피지 않은 점이다.

중국의 경우 보리 고개라는 말은 없다. 양쯔 강 이남과 이북의 기후대가 달라 농업이 아예 딴판이어서다.

그러나 중국에 보리 고개 같은 기아가 없었다는 말은 전혀 아니다. 아니, 중국의 기아는 한국의 그것을 능가하는 면이 있다.

예를 들어 황하 유역의 중원평야는 한반도 몇 배의 넓이에다 땅이 기름져 거름이 없어도 소출이 좋은 천혜의 땅이지만 대륙성 기후의 심술을 당하면 몇 년이고 비가 오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펄 벅의 ‘대지’에서도 그런 기아 상황에서 주민들이 폭동을 일으키는 장면이 나오지 않던가.

중국의 기아가 한국의 그것보다 더 심했다고 추정하는 한 근거로는 중국의 역사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식인문화를 들 수 있다.

‘수호지’에서 사람고기로 만두를 빚는 이야기는 소설적인 과장으로만 볼 수는 없다. 중국의 식인문화가 여러 형태로 존재했다는 것은 중국인들 자신도 인정하고 있다.

물론 식인문화가 반드시 기아에서 비롯됐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한나라 초기 유방이 공신인 팽월을 죽여 그 고기로 젖을 담아 중신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삼국지에서 동탁이 장온을 죽여 쟁반 위에 올려놓고 대신들에게 보여주었다거나 그 고기로 국을 끓여 중신들에게 맛보게 했다는 버전들도 있다.

그런 이야기는 기아와는 상관없는 공포정치의 일환이지만 그 배경에는 식인문화의 전통이 깔려 있고 그 뒤에는 아사의 토양이 자리 잡고 있었던 셈이다.

굶어 죽은 가족을 성 밖에 내다 놓고 이튿날 묻으러 갔더니 밤사이에 주민들이 시신의 살을 모두 발라 먹어 뼈만 남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 중국에서도 이제 아사자는 나오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현대중국사에서 ‘국부(쑨원)’나 ‘혁명의 영웅(마오쩌둥)’은 있어도 ‘아사를 없앤 영웅 ’이라는 말은 들리지 않는다.

그것이 역사의 발전을 긴 안목에서 본데서 오는 것이라면 긍정적이다.

이를테면 프랑스 혁명은 루이 16세의 대처방식이 미흡한 면도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베르사이유 궁전을 짓고 “짐이 국가다”고 큰소리 쳤던 태양왕 루이 14세가 씨앗을 뿌렸다는 시각이다.

물론 그런 사고에는 상당한 역사적 소양이 필요하다.

그렇다고는 해도 보리 고개의 신화에 비친 한국인의 사고는 너무 단기간의 현상에 머문다.

그래선지 한국의 위정자들도 장기적인 프로젝트를 외면한 채 당대에 업적을 세우려 부심하는 꼴이다.

한국의 경우 일본의 세이칸 터널 같은 굴지의 사업이 불가능할 것만 같다. 일본의 혼슈와 홋카이도를 연결하는 이 터널은 1961년에 착공해 1988년 준공되기 까지 27년에 걸쳐 수많은 총리들이 릴레이식으로 공사를 떠맡아 대미를 장식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그것이 가능할까. 따지고 보면 이명박이 내세웠던 한반도 운하나 그가 결행한 4대강 사업도 장기간에 걸쳐 후대 대통령들이 릴레이식으로 참가하는 게 정상이 아니었을까.

물론 그것은 다른 의미에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사업에 참가한 업체들이 이명박의 고교 동문 사업자들이라는 등 온갖 찜찜한 이해관계가 얽혀있어 후대에 넘기기에 껄끄러운 면이 있어서다..

그것은 비리와 관련된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문제에서도 우리나라는 당대에 해치우려는 관행이 뿌리박혀 있다.

김영삼의 조선총독부 철거가 그 대표적이다.

지난날 조선총독부 건물이었으나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을 철거해야 하느냐는 데는 반론도 많았으나 그런 문제는 따지고 싶지 않다.

다만 국립중앙박물관을 새로 만든 뒤에 철거하는 것이 순리였음을 지적하고 싶다. 그럼에도 불쑥 건물을 철거한 바람에 국립중앙박물관은 콘세트 같은 데서 셋방살이를 해야 했다.

하지만 김영삼은 ‘조선총독부 건물을 없앤 대통령’으로 마치 고난의 투쟁을 겪은 민족지도자처럼 미화되고 있다.

내 눈에 그것은 ‘보리 고개’의 신화처럼 허황한 ‘조선총독부’신화와 다를 바 없다.

김영삼이 그런 명성을 얻으려고 국립중앙박물관에 ‘피난살이’를 시킨 것이야 말로 그가 내세운 민족정기와는 배치된다. 어찌 한 나라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중앙박물관을 ‘이유 없이’ 피난살이시킬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장제스(蔣介石)가 대륙을 잃고 타이완으로 쫓겨나는 와중에도 문화재를 챙겨와 고궁박물관을 세운 사실을 알고 있을까. 그리고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용인하다시피 한 마오쩌둥(毛澤東)의 심기도 헤아렸을까.

그런 문화재의 운송사업을 게릴라식으로 저지하는 것은 홍군의 전공이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문화재에 손상이 갈까봐 마오쩌둥이 일체 손을 쓰지 않은 것은 공적도 많고 과실도 많은 그의 공칠과삼(功七過三)에서 눈에 띄지 않는 공적인 셈이다.

그러나 취임직후 궁정동 안가를 철거해 박수를 받은 김영삼은 이듬해 외인아파트를 폭파하더니 그 여세를 몰아 대선 공약에도 없던 조선총독부 철거를 강행한다. 다시 말해 평소에 별로 관심 없었던 일제 잔재에서 갑자기 ‘민족적 영웅’의 발판을 발견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국립중앙박물관 건립을 발표하면서 서둘러 조선총독부 건물 해체를 강행한 것이다. 순리대로 2005년 새 국립중앙박물관이 개관 된 뒤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한다면 노무현이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한 것으로 기록될 판이어서 그런 편법을 썼다고 밖에는 해석될 수 없는 일이었다.

앞서 한국에서는 여러 위정자들이 대를 이어서 하는 사업이 힘들다고 했는데 국립중앙박물관의 해체와 신축은 그런 경우에 해당한 셈이다. 그러나 모처럼 그런 계기를 맞자 김영삼이 서둘러 그 사업의 ‘앙꼬’를 먹어버린 셈이다.

그것은 김영삼을 비판하기 전에 한국인들의 허약한 ‘시력’을 탓해야 할지도 모른다. 보리 고개를 없앤 사람이라는 허상을 떠받드는 그 졸렬한 시력을…

2017.06.19 작성

* 양평 <세계일보 문화전문기자, 서울경제신문 문화부장, 한국일보 문화부 차장(한국일보 견습 25기)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