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630 [칼럼니스트] 2017년 1월 18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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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말 - 그 이상한 뒤안길(01)
양평 梁平   (서울칼럼니스트모임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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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말이 아니라도 말은 사회생활의 기본이다. 그것은 정확한 말이 정확한 사회의 바탕이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 우리나라의 심한 사회적 갈등도 달리 표현하면 말의 병리라고 할 수 있다. 모두다 ‘정의’니 ‘자유’니 떠들지만 그 뜻이 제각각이니 우리 사회가 마치 바벨탑 같은 모양새다.

말은 물론 불안한 사회상황에서 불순한 세력에 의해 타락하기도 하지만 그런 것만은 아니다. 말은 생물이어서 진화하거나 퇴화하는 등 변모하며 그러다 보면 ‘변종’이 생기기도 한다.

그런 말들을 모아보았다.

다만 나는 언어학자나 그 비슷한 전공도 거친 바 없다. 그래서 한 생활인의 눈으로 우리 주변에서 흔히 쓰이는 말들 가운데서 이상한 것들을 챙겨보았다.

그뿐 아니라 이제는 거의 쓰이지 않는 지난날의 말에서도 그 말이 생기게 된 배경을 더듬어 보았다.


1)‘일보직전(一步直前)’-- 말의 값이 떨어진 현상

언젠가부터 우리 매스컴에서 ‘일보직전(一步直前)’이라는 말이 많이 쓰이고 있다. 워낙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어 이제는 그것이 이상하다고 하면 자칫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 정도여서 이를 거론하기도 망서려질 정도다.

그러나 내가 1970년 기자생활을 시작할 무렵은 물론 그 이후도 오랫동안 ‘일보전’이나 ‘직전’이라는 말은 썼어도 ‘일보직전’이라는 용어는 보지 못했다.

그 뜻을 풀이해 봐도 ‘일보전’은 우리말로 ‘한걸음 앞’이고 ‘직전’은 ‘바로 앞’이니 결국 같은 뜻이다.

그것을 더 강조하기 위해 ‘일보직전’이라고 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닌 것 같다. 만약 그런 경우라면 ‘일보전’이나 ‘직전’이라는 말도 함께 쓰여야 하나 요즘은 대부분 ‘일보직전’으로 통일된 느낌이다.

그것이 ‘일보전’을 강조한 것이라고 하면 문법적 문제도 생긴다. 예를 들어 ‘사망 직전’이라는 말이 ‘사망’과 ‘직전’이라는 두 단어로 분해되는 식으로 ‘일보(一步)와 ’직전(直前)‘을 분리해놓고 보면 원래의 뜻과는 다른 여러 가지 의미로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굳이 상상력을 동원하자면 중병으로 한 걸음도 걷지 못하던 사람이 회복돼 한 걸음(一步)을 떼기 직전이라는 표현 같은 것으로도 읽힐 수 있는 것이다.

중국어 학자인 강계철(姜啓哲) 외대 명예교수는 중국어에서 ’일보직전‘이라는 말이 쓰이지 않고 그렇게 말하면 한국에서 쓰이고 있는 그 말의 용도와는 전혀 다른 이상한 의미로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일반적인 용어의 변모과정과도 딴판이다. 말은 ’대한민국‘이 ’한국‘으로 ’박근혜 대통령을 사랑하는 모임’이 ‘박사모’로 되듯 간결화 과정을 거치는 게 상례다.

순수한 우리말의 경우도 ‘어제 저녁’이 ‘엊저녁’이 되는 식인데 ‘일보직전’은 똑같은 상황을 설명하면서 더 복잡한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두 글자나 세 글자로 될 것을 왜 네 글자로 표현한단 말인가.

물론 같은 뜻을 표시하더라도 때로는 리듬이나 문장의 멋을 살리기 위해 복잡하게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

링컨의 게츠버그 연설에 나오는 “…인민의 인민에 의한 그리고 인민을 위한…”이라는 표현이 좋은 예다. 전문가들은 인민의 정부가 결국은 인민에 의한 정부고 인민을 위한 정부이며 인민에 의한 정부도 마찬가지라는 분석이다. 다시 말해 물리적으로는 별로 의미 없는 말을 나열한 셈이다.

그럼에도 이 연설은 그 삼박자의 표현으로 길이 남는 명연설이 됐다. 만일 “인민에 의한 정부는…”이라고 군더더기 없이 ‘정확히’ 표현했더라면 그 연설이 그처럼 유명해졌을까.

하지만 ‘일보직전’의 경우 그런 것과도 거리가 멀어 보인다.

왜 그처럼 ‘낭비적’이고도 불편한 표기가 등장한 것일까.

그 문제를 설명한 책이나 글은 본 적이 없다. 아니 그 문제에 모두들 너무 무관심하기에 내가 자신 없는 펜을 든 셈이다.

그래서 나는 그것이 우리말의 인플레 현상이라고 나름대로 진단했다. 다만 여기서 ‘우리말’이라는 것은 순수한 우리말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쓰는 모든 말을 지칭한 것이다. ‘일보직전’도 한자어 아닌가.

달리 말하면 일본인에게도 ‘정의’와 ‘평등’이라는 ‘우리말’이 있으나 그것들이 한국의 ‘정의’와 ‘평등’과 가치나 함량 면에서 다를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우리의 경우 말 값이 크게 떨어지다 보니 원래 있던 것으로는 허약해 보여 뭔가 보조물 같은 것을 곁들이려는 움직임이 ‘일보직전’ 같은 현상으로 나타난 느낌이다.

마치 도시락이 갑자기 칼로리가 부족해 보여 도시락에다 빵이나 계란을 곁들이는 식이다.

지금까지는 이상이 없어 보이던 벽의 벽돌이 허약해 보여 그 안이나 바깥에 비닐판 같은 것을 대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일보직전’의 경우 ‘일보전’과 ‘직전’이라는 똑같은 두 개의 벽돌이 다 허약해 보여 두 개를 포개서 하나로 사용하는 격이다.

왜 그처럼 말의 가치가 떨어졌을까. 말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우리 역사가 잘못된 것이다.

역사의 주체 세력들은 통치의 필요상 좋은 말들을 많이 써먹지만 그들의 행동이 딴판이다 보니 그들이 써먹던 좋은 말들이 빛을 잃고 웃음거리가 된 것이다.

나는 1960년의 4?19 전날인 4월18일의 고대생 시위에 참가한 바 있다. 당시 국회의사당 앞에 모인 학생들이 말을 하려해도 마이크가 없어 쩔쩔매고 있을 때 마이크를 장착한 지프 한 대가 왔다. 그러나 마이크에 ‘自由…’라는 글이 보이자 ‘자유당’을 연상한 학생들은 물러나라고 외쳤다.

그 때 지프에서 한 사람이 내리더니 마이크를 돌려 보여 주었다, 그러자 마이크의 둥근 안쪽에 쓰여진 ‘自由소리사’라는 글이 완전히 비치고 학생들은 환영과 환호를 보냈다.

그것은 ‘자유당’ 폭정이 ‘자유’라는 말의 넋을 빼고 그 외관을 먹칠한 사례였다.

자유당은 그 뒤 곧 무너졌으나 ‘자유’라는 말은 아직 제 값을 찾지 못하고 있다. 요즘도 ‘자유’를 내세운 단체들은 많고 그 가운데 일부는 어딘지 ‘자유당’을 연상케 하는 행동을 하고 있어서다.

‘자유’뿐이랴.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이 민주정의당을 창당했을 때 우선 ‘민주’라는 말이 쓰레기같이 돼버렸다. 그 후 그가 대통령직을 물러난 뒤 부정축재로 무기징역과 2200억 원의 추징금을 선고받자 ‘정의’라는 말이 걸레가 됐다.

그 뒤 ‘범죄와의 전쟁’을 내세우며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가 전두환과 엇비슷한 부정혐의로 쇠고랑을 차자 ‘범죄’와 ‘전쟁’이라는 말의 뜻이 행방불명된 기분이었다.

‘민중의 지팡이’들이 ‘민중’운동을 한다는 이들을 숨 가쁘게 뒤쫓는 상황에서는 같은 말이 ‘건전한’ 말도 됐다가 ‘불온한’ 말이 되기도 해 어지럽기만 하다.

최근 새누리당에서 탈퇴한 당원들이 창당한 ‘바른정당’이 창당과정에서 당명을 정하는 데 어려움을 겪은 것은 우리 헌정사의 비극이자 우리말의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상해 임시정부시절부터 수많은 정당들이 정권다툼을 한 것이 우리 현대정치사의 비극이라면 그 많은 정당들이 사라지면서 그 이름에 쓰인 좋은 말들이 값을 잃어버린 것은 우리말의 비극인 셈이다.

이제 당명에 써먹을 좋은 말들이 남아 있지 않아 쩔쩔맨 것은 바른정당의 문제만도 아니다. 앞으로 창당할 정당들은 당명을 짓는 일이 창당자금을 확보하기보다 어려울 지경이다.

굳이 한 가지 좋은 점을 찾자면 바른정당의 ‘바른’같이 우리말이 쓰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더불어 민주당’의 ‘더불어’나 ‘새누리’ 등 우리말 정당이름이 최근의 추세가 됐다.

우리 정치계가 유독 우리말 사용에 관심이 높아서일까? 아무리 봐도 그런 기미는 없다. 나의 눈에 우리 정치인들은 우리나라의 어느 계층보다도 한문식 문자를 선호하는 체질이다.

그러나 ‘민주’ ‘정의’ ‘한국’ ‘통일’ ‘독립’ 등 격조 높은 한자들이 동이 난 마당에 당을 만들려니 팔자에 없는 국어 사랑을 하는 것으로 비친다.

그럼 왜 ‘일보직전’ 같은 말들이 많이 생겨나지 않았을까. 나는 그 정확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짐작은 있다.

‘일보직전’의 경우 우연히도 ‘일보전’과 ‘직전’이라는 유사한 말이 거의 같은 빈도로 사용되다가 말 값이 떨어지는 환경에서 저절로 둘이 포개진 것으로 비친다.

‘일보직전’처럼 확연히 드러나지 않지만 우리말의 행간을 들여다보면 말들이 내면적으로 늘어나고 있기도 한다.

예를 들어 ‘엄단(嚴斷)’은 ‘엄히 처단(處斷)한다’는 뜻이니 겉으로는 ‘처단’과 같은 두 글자지만 실질적으로는 늘어난 셈이다.

말의 값이 떨어져 ‘처단’한다고 당국이 눈을 부라려도 반응이 신통치 않자 ‘엄히 처단 하겠다’고 하는 셈이다. 그래서 ‘처단’은 사라지다시피 한 채 ‘엄단’이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일보직전’의 경우와 마찬가지다.

그럼 ‘처단’대신 ‘엄단’이 통용되는 우리 사회에 범죄 등 사회악이 많이 사라졌을까. 그 답은 ‘범죄와의 전쟁’을 지휘했던 사령탑이 수천 억 원 대의 의 부정을 저지른 사건이 대신 말해 준다.

다시 말해 지난날은 ‘처단’으로 됐던 것이 그 뒤 ‘엄한 단속’으로 늘어났으나 사회가 혼탁하다 보니 실질적인 말의 값은 전보다 떨어졌다.

예를 들면 재벌과 유력자 집안 자제들이 그랜저를 타고 가다 프라이드가 앞을 가로막는 다고 벽돌로 때려 중상을 입혀도 집행유예로 풀려난 상황에서 “폭력을 엄단 한다”고 호통 쳐도 영이 서지는 않는다.

이제 ‘엄단한다’는 말도 부족해 말을 더 늘려야 정확한 뜻을 전달할 수 있게 됐다.

예를 들자면 “최순실 같은 빽도 없는 자가 xx행위를 저지르면 엄히 처단한다”고 해야 맞다.

아니면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세태’에 따라 “돈 없는 개털이 xx행위를 하면 엄히 처단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런 우리말의 수난을 막으려면 어찌 해야 할까. 그 해법은 간단하고도 어렵다.

사람(人)이 말씀(言)과 함께 하는 것이 믿음(信)이라고 하니 사회가 믿음을 회복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떨어져 말 값이 떨어진 상황에서 믿음을 회복하기는 말처럼 쉽지 않다. 교장선생님들의 훈화나 TV에 나오는 명사들의 말을 들어보면 믿음을 회복하기가 간단하고 쉬울 것 같으나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는 설명이 필요없다.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으니 우리는 태산을 옮기듯 신뢰를 쌓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야만 한다.

그런 과정의 일환으로 정치권에 한 가지 제안하고 싶다. 앞으로 정당 이름을 바꾸지 않겠다는 것을 정강으로 삼아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정당이 표현하고 있는 말의 값을 높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추상적인 주문만은 아니다.

세계의 모범 정치가 이루어지고 있는 영국이 그것을 실천한 바 있다.

영국 보수당의 전신인 토리(Tory)당의 ‘토리’는 17세기 당시 아일랜드의 유적(流賊)을 지칭한 말이었다. 그에 맞선 휘그(Whig)당의 ‘휘그’도 스코틀랜드의 폭도를 지칭했다. 그러나 토리당은 온갖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오늘날 ‘보수당’으로 세계 보수주의자들의 종가가 됐다. 휘그도 토리의 상대역으로 오늘날 영국 정치를 길러냈다.

나는 우리나라 정당들의 이름들을 전부 몰수한 다음 그 이름들을 제비뽑기 식으로 배정해 줘도 큰 문제가 없을 것 같다는 우스꽝스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우리 헌정사에 나온 정당의 이름들이 모두 높은 이상을 천명하고 있어서다.

설령 보수적인 새누리당이 너무 진보해서 망한 ‘진보당’이라는 이름이 배정됐다 해도 그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다. 새누리당이 진보를 외면한다는 말은 들은 적 없다.

그래서 당이 위기에 몰린다고 금방 간판을 갈기보다 그 간판의 때를 벗겨내고 빛나게 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면 우리 정치와 더불어 우리말도 빛이 날 것이다.

- 2017.01.16 작성